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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4:30]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 박동진 목사

코이네 2018. 6. 2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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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본문 : 에베소서 430

2018.6.24.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설교 : 박동진 목사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과 그 사람을 부른 하나님이 함께 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부른 사람이기에 우리를 부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 뜻을 따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일까요? 사도 바울은 4:25-5:4까지에서 여섯 가지의 구체적인 윤리적 행위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 권면의 형식은 “~~ 하지 말고, (돌이켜) ~~하라!”입니다.

첫째, 거짓말을 하지 말고 돌이켜 참된 것을 말하라(4:25)

둘째, 화를 내지 말고, 돌이켜 너희의 분이 의로움을 확실하게 하라(4:26-27),

셋째,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수고하며 주는 자가 되라(4:28).

넷째, 입으로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돌이켜 선한 말을 하라(4:29-30).

다섯째, 불친절과 악독을 버리고, 돌이켜 인자하며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4:31-5:2).

여섯째, 음행과 관련된 말을 하지 말고,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5:3-4)

 

여기서 돌이켜라는 말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들은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거짓말하는 자는 회개하고 이제 참된 것을 말하고, 도적질 한 사람도 회개하고 이제 열심히 일해서 남을 돕는 자가 되어라.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삶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회개해서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가운데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할 도덕적인 원칙을 제시하다가 갑자기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한 후 다시 도덕적인 원칙으로 돌아갑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잘 나가다가 왜 갑자기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할까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도 올바르게 살기 위해 많이 노력합니다. 의지를 더욱 굳게 세우려고 하고,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인격수양을 합니다. 그래서 존경받는 삶을 산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좀 다릅니다. 우리도 역시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많이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변화를 날마다 이루어가야 합니다. 날마다 돌이켜서 회개해서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단순히 주어진 도덕을 잘 지킴으로, 인격 수양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보다 좀 더 근원적인 변화가 먼저 선행합니다.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오신 성령께서 돌이켜 변화되는 삶을 일으키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9)

 

이 말씀대로라면 성령께서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바로 믿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있다. 이를 한자어로 말하면 내주한다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셔서 내주하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더욱 믿음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삶을 주장하고, 내 생각을 지배하고, 내 안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실 때에 내 삶이 점점 변화가 됩니다. 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소원이 달라지고 꿈이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내면의 세계가 달라집니다. 내주하는 성령께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과 확실한 증거와 은사를 주십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과 변화된 삶과 승리의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과 동고동락하는 벅차고도 놀라운 축복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5, 10, 20년이 지나게 되면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한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내면으로부터 은은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납니다. 행동 하나 하나에 사랑이 묻어납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힘든 일을 만나도 별로 요동하지 않습니다. 시련이 닥쳐와도 오두방정을 떨지 않고 잘 참고 견딥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어찌하든지 돕고자 합니다. 혈기가 가득 하고, 게으르고, 방탕했던 사람이 온유하고, 충성스럽고,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세상에 유혹이 닥쳐와도 잘 이겨내는 절제의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합니다. 부요합니다. 마치 방금 엄마 젖을 먹고 난 후 새근새근 잠든 어린아이처럼 모든 게 만족스럽고, 평온합니다. 진정한 평안 샬롬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 믿는 자의 복이 이런 것이로구나!’하고 가슴 벅찬 행복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이전 보다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더 깊은 헌신으로 들어갑니다. 가식 없는 진실함으로 이웃을 대하며 사랑으로 섬기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로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데도 그 성령을 의식하지 않거나, 없는 듯이 여기며, 무시하고 살아가면 성령께서 슬퍼하십니다. 성령께 의지하고 의논하고 그 분의 지혜를 얻으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내 맘대로 행동할 때 성령은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근심할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삶에 권태감이 생기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점점 기계적이고 형식적이 됩니다. 이내 마음이 부패해져서 옛 습관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죄의 충동에 쉽게 무너지고, 패배의 삶으로 악순환이 됩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상황이 더 악화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원천은 바로 성령에 있다. 나의 노력, 나의 능력, 나의 수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성령께서도 근심하시는가? 하나님도 근심하시는가? 우리는 흔히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말을 씁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과 같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감정을 느끼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근심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며, 유머도 있고, 다정다감하기도 한 분입니다.

그러면 근심하다란 무슨 뜻일까요? “근심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루페오(lupeo)인데, 이는 고통, 비관, 슬픔을 갖게 하다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이나 공동번역성경에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걱정과 근심 그리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근심하십니까? 자녀들이 밤이 늦었는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어서 근심하지 않습니까? 또 내일이 카드값 갚을 날인데 돈이 없어 쩔쩔매는 경험 해보셨죠. ‘루페오근심하다는 말은 이 정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말년에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습니다. 한 밤 중에 아들을 피해 도망가면서 그는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여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ᅟᅥᆼ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입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작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짐작이 되십니까? 이는 마치 로마 황제 율리우스 시저가 충복이었던 Brutus의 배반으로 칼에 찔리는 것과 같은 반역의 정치상황 속에서 왕이 갖게 되는 충격적인 아픔을 겪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성령을 마음 아프게 하고, 슬프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령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성령과 틀어진 그래서 성경을 근심하게 하는 경우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성령을 거스리다

"성령을 거스린다"는 말을 헬라어로 안티핍토(ωντιπιπτω)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의 뜻은 반대하다”, “거역하다”, “저항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순종하지 않고, 반대하고 거역하고, 오히려 저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거스리면 성령은 근심하시며 슬퍼하십니다.

 

2)성령을 훼방하다

훼방한다는 것은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잘 못되도록 방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려서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셔서 그가 말하며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주변에 둘러서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마귀의 왕 사탄의 힘으로 고쳤다고 고집을 부리며, 예수님이 행한 기적들을 마귀의 일이라고 사실을 호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성령이 하신 일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이를 사탄의 역사로 폄하하고, 왜곡하고, 조롱하여 결국 성령을 모독한 죄를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3)성령을 소멸하다

데살로니가전서 5:19절 말씀에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소멸하다"라는 말은 "불을 끄다"라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불로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그 성령님의 불을 꺼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 성령님을 소멸하는 것에 대해서 이런 예화를 했습니다. 한 청년이 대학에 들어가서 한 여학생을 가슴 깊이 짝사랑하게 됐답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에 느닷없이 이 여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답니다. “오늘 야외로 놀러 가려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 순간적으로 너무 바라던 일이어서 가겠다고 하고 약속을 했답니다.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계속해서 마음속에서 한 음성이 들려 왔답니다. “오늘은 주일이야! 가면 안 돼.” 바로 성령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괴로워하면서도 야유회를 다녀왔답니다. 돌아와서 너무 괴로워서 울면서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한 달쯤 지나서 그 여학생이 주말마다 하는 학원에 함께 다니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여학생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생각 없이 그렇게 하자고 동의를 했답니다. 또 마음속에서 음성이 들려 왔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취소해라그러나 이 청년은 애써서 이 음성을 외면했답니다. 그런 음성이 들릴 때면 다른 생각을 하거나 음악을 들으려 했답니다. 주일에 교회가지 않고 학원으로 야외로 다니기 시작하면서 계속 그 음성 때문에 시달렸는데 한 달 지나고 두 달 지나면서 점점 그 음성이 희미해지더니 언제인가 부터는 아예 그 음성조차 들리지 않더랍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말하실까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당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생각을 갖도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 마음속에 어떤 음성을 들려주실 때도 있고, 때로는 큰 감동을 주시고, 때로는 큰 결단을 촉구하시고, 때로는 크게 책망하시기도 합니다. 그 때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하고 그 역사하심을 거부하는 행위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주님을 떠나 살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소멸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을 무시하면 성령과 멀어지고 마치 불이 꺼지듯 우리 안에서 성령의 활동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심을 잊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시지 마십시다. 내 안에 계시는 그분 성령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과 함께 하며 성령을 사랑하고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또한 우리가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

구속의 날은 주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사명을 다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앞에 서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는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표식은 바로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로 표식입니다. 구원은 단지 한 번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을 거스리고 훼방하고 소멸하여서 어떻게 그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6:4-6)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근심하게 하면 우리는 점점 육체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육체의 소욕에 지배되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는 그러한 것들을 이용하여 그러한 사람을 공격하고 모독할 것입니다. 마귀는 더욱 비열하고 추한 생각들, 그런 죄의 소원을 그 사람의 마음속에 집어넣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마귀의 지배아래 사는 육욕의 노예가 되어갈 것이며, 마침내 다시 회개할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로마서 121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자기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의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라는 말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 동물처럼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항복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좋은 사람은 내가 무엇을 잘하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항복을 잘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수영을 배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에서 수영을 해보려고 발버둥을 치면 더 가라앉게 됩니다. 그래서 수영교사가 처음 수영을 가르칠 때 긴장을 풀고 먼저 물에 뜨는 법부터 배우게 합니다. 수영은 우리가 물과 싸우지 않을 때 자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의 긴장을 풀고 하나님께 항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성령 충만함을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마치 아침 햇살을 맞는 꽃과 같이 생기 있게 될 것이고, 계속 내 안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시드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감동하심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그 감동은 우리를 뜨겁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감동입니다. 이 감동하심을 잊어버릴 때에 냉랭한 형식적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특히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성령의 감동을 기대하며, 성령의 감동이 있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찬양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듣고, 성령의 말씀으로 봉사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진실한 마음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그 자리에 천국의 감동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성령은 근심케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늘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인식하고, 성령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동으로 살아가길 축원합니다. (*)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