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엡3:8]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

코이네 2018. 10. 10.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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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량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

말씀: 3 : 8-9

2018. 1. 7.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신년주일)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삼으신 이유를 두 가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이며, 이로 하나님께서 그 심오한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시고 있는지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 이것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복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그 풍성한 은혜,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긍휼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 죄인들을 대할 때 가지는 기본적인 태도가 긍휼입니다. 빌립보서에 예수님에 대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이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눈에 보인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나약하고, 죄 많고, 병들고, 가난하고, 교활하고, 잔혹하고, 무자비하고, 비참한 모습. 하나님께서 만드시곤 매우 좋다고 하신 그 인간들이 이렇게 타락해서 하루하루 죄로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셨을 때 얼마나 통탄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세상과 따로 떨어져 사신 것이 아니라 그 세상 중심에서 그도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어 이 땅에서 살았습니다. 약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억눌리고 어디 하소연할 데 없는 비루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 교활하고 야비한 사람들,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사람들, 야비하고 교활한 사람들, 무자비하고 악독한 사람들, 지옥가기 딱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과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축복하고, 병을 고치며, 이들에게 하늘의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음모와 가당치 않게 천국을 보여달라는 사람들, 자신을 증명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질시와 미움을 받았습니다. 믿고 사랑했던 제자들의 배신을 보았고, 그를 메시아라 따르던 사람들의 조롱을 겪어야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았던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조상 탓, 세상 탓하며 살던 희망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준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에게 고발한 배은망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 자격이나 있을까 싶을 만큼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도 찾아가서 만나셨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그를 치료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우리들을 항상 긍휼의 눈길로 보았습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심판받아 지옥불에 떨어져도 시원찮을 그런 인간들을 향해 분노와 저주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받아야 할 인간, 고쳐지고 회복되어야 할 인간,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야 할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모든 인간들이 이 비참한 죄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 오직 이 한가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람들을 보았고, 만났고, 치료했고, 사랑했습니다.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주님은 맞아주셨고, 들어주셨고, 고쳐주셨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에 물든 우리를 질타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시며, 죄로 병든 인생을 보듬어주셨고, 고쳐주셨습니다.

 

둘째, 용서

 

미국에 어느 목사님은 원고를 적어서 원고대로 읽어가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맨 앞줄에 앉은 감사 집사님 때문에 설교하다 낭패를 당합니다. 이 집사님은 설교를 듣다 은혜를 받으면 온 교회가 떠나가도록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고함을 치니깐 그 소리에 놀란 목사님이 그만 원고줄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당황하고 더듬거리고 진땀을 흘리다 설교가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곳에 있는 도지사와 경찰서장이 주일예배에 참석한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제일 먼저 떠오는 사람이 바로 이 감사 집사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감사 집사를 목사님 사무실로 불렀었습니다. 교회 옆에 있는 사무실로 불러서 집사님 오늘은 교회당에 오시지 마시고 내사무실 좀 지키십시오.” “목사님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데 왜 지킵니까?” 그래도 목사님이 아주 완강하게 오늘은 내 사무실을 지키되 여기서도 기도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면 또 감사하고 할렐루야를 할테니까...” 그러면서 제일 재미없는 책을 하나 주었습니다. 지리책이었습니다. 설마 지리책 읽다가 감사하다고 소리치진 않겠지. 마침내 교회에 도지사가 오시고, 경찰서장이 왔습니다. 목사님은 그가 준비한 원고지를 차근차근 읽어나갔습니다. 절반쯤 읽어 나가는데 목양실에서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고함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만 목사님이 원고줄을 또 잃어버렸습니다. 막 진땀을 흘리고 헛소리를 하고 그날 예배를 완전히 망쳤습니다. 겨우 예배를 마친 다음 목사님이 성이 가득 나서 사무실로 가서 집사님 도대체 지리책을 읽고 무슨 할렐루야! 감사합니다가 나옵니까? 도대체 왜이러십니까?” 하니깐 그 집사님이 이럽니다. “목사님 여기 한번 와보십시오. 이 지리책 이거 한번 보십시오. 필리핀 해변에 바다깊이가 만 미터라 그럽니다. 성경에 내 죄를 영원히 바다 속 깊은 곳에 던졌다 그랬잖습니까? 내 죄가 만 미터 바다 밑에 가라앉았으니 다시 떠오르지 못할 것 아닙니까!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너무 감사해서 아예 그냥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를 외쳤죠

 

여러분,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통 속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죄의 십자가 그 죽음의 고통과 죽음의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다시 떠오를 수 없는 깊은 바다에 던져버렸고, 우리를 용서받은 죄인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고,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다해 우리 죄를 대신 져주신 예수님의 그 은혜로 용서받은 것입니다.

 

셋째, 사랑

 

또한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모든 행동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13장에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이나 초월적인 능력에 대해 감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초월적인 행동 역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하신 행동이지, 신적인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을 뽐내기 위해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초월적인 능력을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주님은 바다의 광풍도 잠재우고, 나병환자도 고치시며, 오병이어로 굶주림에 지쳐있는 수천명의 사람을 배불리 먹이셨으며, 심지어 죽었던 사람까지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연의 섭리까지도 거슬러가며 우리를 사랑하고, 살리는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목숨 걸고 사랑하셨으며, 목숨을 내놓고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시기에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져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어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마귀가 이 세상을 지었고, 마귀가 주인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사는 게 하루하루가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감사하게도 이 세상의 주인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 참 좋은 우리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고, 그 분의 사랑스런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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