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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G. 피니(Charles Grsndison Finney) 설교자는 변호사와 배처럼 설교해야 한다

코이네 2021. 8. 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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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미국에서는 영혼 구원의 과정에 대한 논증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적인 칼빈주의적 구원교리가 보다 알미니안주의적인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구원에 있어서 자유 의지의 역할과 인간의 반응이 더욱 크게 역설되었고, 즉각적 회심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가능성이 강조되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부흥 운동의 방법들도 점차 실제적 구원 체험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찰스 그랜디슨 피니(Charles Grsndison Finney)는 19세기 미국에서 회심 체험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복음 전도자일 것이다.

 

 

 

찰스 피니(1792 - 1875)는 1821년 10월 10일에 극적인 회심 체험을 하였다. 피니는 회심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821년 가을의 어느 주일 저녁에 나는 내 영혼의 구원 문제를 즉시 결말 짓기로, 가능하다면 하나님과 화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 후 즉시 유능한 부흥 설교가가 되었으며 결국은 조지 휫필드를 제외한다면 최초의 국제적 명성을 떨친 전도자가 되었다. 부흥사로서의 피니의 탁월한 성공은 1826년부터 1831년 까지의 기간에 이루어졌다. 그 기간에 피니는 뉴욕 중심부의 “부흥운동 중심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집회를 여는 곳마다 회심자들을 획득하였다. 1820년대 후반과 1830년데 초에 피니는 부흥 집회를 통해 “부흥운동 중심지”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회심과 개인적 의를 역설한 순회 설교가로서의 그의 위대한 성공은 자신의 공식적인 신학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몇 년간 순회 설교가로서 사역을 행한 후 피니는 1832년에 뉴욕시의 캐덤 스트리트 교회(Chathan Street Church)로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다.뉴욕에서 장로교회의 목사로 있는 동안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가운데 하나인  ‘신앙 부흥 강론(The Lectures on Revivals of Religion)'을 출간하였다. 그 책은 신앙 부흥을 촉진시키기 위한 수단과 방법들을 자세하게 서술하였고 신앙부흥의 기술에 대한 존문적인 안내서를 만들어 내게 하였다. 그의 작품이 어떤 자연 과학이나 공학의 교재만큼이나 건전하게 과학적 법칙들에 기처하였음을 주장하면서, 그는 관심을 일으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과 회심으로 이끄는 특별한 기슬들을 말하였다. 

 

예를 들어 , 그는 기록된 설교를 반대 하였는데 왜냐하면 기록된 설교는 자연적인 사고 흐름을 방해하고, 감정을 가로 막고, 제스쳐의 사용을 적게하게 하기 때문이다. 피니는 변호사와 배우들을 성직자의 모델로 제시할 것을 제안했다. 성직자들은 회중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일상회화의, 번호사와 같은 스타일”로 설교해야 한다. 게다가, 회중들이 회개에 까지 움직여지도록 하기 위하여,  성직자들은 작가의 정신과 의미를 온전하게 전달하기 위해 “살아있는 실체”로서 청중들에게 그 정신과 의미를 보여주는 배우들을 모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피니는 그 자체를 위하여 감정주의를 지지한 한 것은 아니었다.그는 그들은 “깨어나게 하기 위해” 개개인을 흥분시키고, 죄인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도록 하기위해 앞자리에 “불안한 자리”를 마련하고 ,“문제를 이슈화 하는 것”은 허용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설교가들은 청중들을 단순히 깨어남에에 더 깊은 확신 가운데로 이끌기 위해 궁극적으로 다른 접근을 해야만 한다. 실재로, 피니는 광신주으 진정한 신앙부흥운동과 조화될 수 없다고 경고 했다. 즉, 예의와 질서가 항상 만연해야만 한다. 
       

신앙 부흥 책을 출간할 당시 찰스 피닌 자신은 분명 온전한 완전주의를 관조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피니의 주된 관심사는 보다 고상한 형태의 기독교적 삶이었다. 피니는 감리교도들이 수용하고 있는 성화의 견해는 다소 알고 있었으나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한 후 피니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되었다. 

 

"전적으로 고상하고 보다 견고한 형태의 기독교적 삶은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드리어 피니는 브로드웨이 장막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두 개의 설교를 전하였다. 피니는 이 초기 시절에 이미 기독교 완전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문제는, 이 용어의 율법폐기론적 의미와 관련하여 ,뉴 헤이븐 (New Haven),앨버니( Albany)에서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뉴욕시에서도 다소 논란거리로 부상하고 잇었다.

 

피니는 ‘완전주의자’라는 제목의 간행물에서 발포된 이견해를 검토하였으나 받아 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금생에서의 성화 교리와 죄를 알지 않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는 의미에서의 완전 성화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교리임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풍부한 수단들이 제공되었음을 또한 확신하게 되었다. 

 

피니의 회심 체험(conversion experirnce)과 전도자로서의 순탄한 성공은 “새로운 수단들”(new measures)과 자신의 신학 체계, 특히 그의 완전주의(perfectionism)교리를 낳는 원인의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그는, 죄인들의 회심에는 그에 상응한는 모종의 사회적 행동이 수반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완전 성화’를 가일층 요란하게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피니의 신학에서 죄는 자발적인 행위었으며 이론상으로 피할 수 있는 어떤 행동이었다. 까닭에 성결은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찰스 피니가 주장했던 완전주의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극히 중요한 것은, 이 이슈가 뜨거운 논쟁거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교리가 이 시기 미국 부흥 운동의 전통적인 칼빈주의의 변화에 관한 본질적인 정보를 또한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참고 서적 :

베실 밀러, 유양숙 역 , 찰스 피니의 생애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2.

장종철, 웨슬리의 교육신학, 감신대 출판사,1990.

박용규,“찰스 피니와 완전주의신학지남,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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