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남북공동성명, 통일의 길, 개성공단 문제로 다시 통일의 물꼬가 트여지길
제가 존경하는 이만열 교수님께서 페이스북에 7.4남북공동성명 41주년에 올린 글을 퍼왔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부르던 노래, 이 노래를 부르지 않게된 때가 꽤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년이 지나도 용서와 화해, 그리고 통일의 길은 아직 요원하기만 합니다. 다행히 개성공단 문제로 남북이 다시 실무자 회담을 개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니 다행입니다.
통일의 염원을 페이스북에 올린 이만열교수@사진 복음과 상황 2007년 10월 15일자 기사에서 퍼옴
[20130704. 7․4남북공동성명 41년] 오늘은 ‘7.4남북공동성명’이 공표된 지 꼭 41주년이 되는 날이다. 아무런 공식 행사도 없어서 이 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분이 그리 많지 않다. 그 날 발표된 공동성명에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남북관계의 기본원칙과 민족통일원칙을 내 놓기도 했다. 나는 41년 전 그 날의 감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1972년 7월 4일 오후, 곧 태어날 둘째 아이를 기다리며 신촌 어느 병원 근처 처형의 약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날 오후는 매우 흐렸고 어둠침침하기까지 했다. 그 때 <7.4남북공동선언>의 내용을 급전하는 호외가 뿌려졌다. 지금도 기억하기로는, 그 때 그걸 알리는 기사의 제호가 ‘큰 대문짝’만하게 보였다. 기대와 환회가 거기에 투영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지금도 그 때 그 기사의 제목이 내게는 ‘큰 대문짝’만했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해방 분단된지 27년째 되던 해였지만, 그 전에는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그같은 기쁨은 없었다. 거기에다 그 이튿날 둘째 아들을 얻는 큰 기쁨도 누리게 되었다. 대학 강단에 선지 불과 2년, 철들고 난 뒤에 쉬지 않고 기도해 왔던 민족 통일이 둘째 아들과 함께 성큼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6.25가 발발한 1950년,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 때 고향(경남 함안)까지 밀고 내려온 북한군 치하에서 몇 달을 보냈다. 부서진 무기는 물론 시체들도 많이 보았다. 최종 전투지역이었던 고향의 학교는 깡그리 부서져 바로 개교하지 못했다. 개교 후에도 포탄을 잘못 갖고 놀던 아이들이 몇 명씩 희생당하는 참상이 나타나자 학교 가기가 무서워 먼산에 나무하러 다녔다. 6.25때 사촌형 두 분이 전사했고, 서울에서 공부하던 막내 자형이 납치되었으며 홀로 된 누님은 40여년간 수절하다 돌아갔다. 6.25전에 이미 간디스토마에 걸려 투약으로 건강을 유지하던 아버님은 전란 통에 약을 구하...지 못해 전쟁 발발 1년 반 만에 돌아가셨다. 이게 남쪽에 거주하면서 전쟁의 상처를 비교적 덜 경험했던 한 소년의 가족사다. 이 땅에서 어떠한 이유로도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굳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늘 평화통일을 평생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근거의 하나다.
7․4남북공동성명에는 통일 원칙으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이렇게 언급했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 밖에도 남북은 긴장상태의 완화, 상대방 중상비방 중지, 무장도발 중지,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고 방지 등을 합의하고, 남북 사이에 다방면에 걸친 제반 교류를 실시하고, 적십자회담의 성사를 적극 협조하며,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를 개설하되, 이런 문제들을 협의 실시하기 위하여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토록 하자고 했다.
7.4남북공동성명서를 주고받는 남북 대표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을 때 국민들의 환호가 대단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당국이 민족(통일) 문제를 구실삼아 정권의 강화를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숨기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남측에서는 그 해 전대미문의 독재를 강화하는 시월유신이라는 조치를 취했고, 북쪽도 김일성에게 초헌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사회주의헌법’을 공표했다. 공교로운 것은 남측이 시월유신 헌법을 공표하고 그 헌법에 의해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날짜와, 북한에서 사회주의헌법을 공표하는 날짜가 다 같이 12월 27이었다는 점이다.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분단 27년 만에 처음 합의한 7․4남북공동성명의 3대 통일원칙은 그 뒤 남북간에 이뤄진 모든 접촉과 대화의 기본지침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올해도 7․4남북공동성명을 맞아 남북이 공동기념행사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지난 달 6일 남북회담 제의와 함께 7.4공동성명 발표 41돌 기념행사도 거론되었다. 그러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의 원칙을 밝힌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 발표 41주년을 맞는 기념식을 남과 북, 해외가 동시에 거행한다"라고 알려졌듯이, 기념행사는 분산 개최될 수 밖에 없었다. 7.4남북공동성명을 되살린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늘 7월 4일, 남북은 7천만 민족의 염원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단을 보였다. 개성공단 문제를 두고 당국회담을 갖자고 합의한 것이다. 국정원 선거부정개입과 NLL문제로 식상한 국민들에게 이건 한 가닥 희망이다. 그 합의가 7.4남북공동성명 발표 41주년을 맞는 이 날에 이뤄진 것은 그 때 가졌던 평화와 통일의 불씨를 살려내려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 여린 끈을 조심스럽게 연결시켜 간다면 41년전 ‘큰 대문짝’만하게 보였던 그런 비전으로 확대시켜 갈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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