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속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교단 총회에서 작성하여 전국교회와 함께 기도하고자 만든 기도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픔과 슬픔을 당한 이들의 마음을 아직 제대로 어루만질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건이 났을 때는 시끌벅적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잊어버립니다. 하도 황당하고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에 우리 국민들은 이런 슬픈 일들에 대한 자기방어기재가 이렇게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 그 때문에 임명받고,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철저하게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이 일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가슴을 들여다볼 생각이 없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 재발되지 않아야겠다는 책임감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빨리 지나가고 잊혀지기만 바랄 뿐이죠.
하지만 잊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는 한 이런 일은 다시 내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덮으려 하지 말고,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또 그렇게 고쳐가야 합니다. 그것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길이며, 희생자 유족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제대로 위로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우리 다음세대가 좀 더 안전하게 살수 있도록 물려줄 수 있는 최소한의 유산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모처럼 내리는 봄비가 참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우산도 없이 그 비를 맞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비가 마치 가족을 잃고 슬피 우는 이들의 눈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이 땅의 라헬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팽목항에서 담요를 들고 돌아오지 않는 아들딸을 기다리며
야속하게도 푸른 바다만 바라보는 엄마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계십니까?
이제는 울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마른 울음을 울다 지쳐 쓰러진 이들을 보고 계십니까?
공포에 질린 채 다가오는 죽음을 속절없이 바라보아야 했던
그 착하디 착한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채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스러진 꽃봉우리들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잊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예수님의 아픈 탄식을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듣고 있습니다.
주님,
뜻하지 않은 시간에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뜻하지 않은 시간에 가족을 잃은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슬픔의 강물에 떠밀리고 있는 모든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가슴 속에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존자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이땅의 청소년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품으로 안으시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십시오.
주님,
인류의 첫 사람을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 유혹하며
기어코 선악과를 따먹게 했던 그 징그러운 뱀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성장과 발전 강박'에 사로잡혀 행복의 신기루를 따라 질주하는 동안,
우리는 하늘도, 이웃도, 자기 자신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모두 괴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효율과 경쟁'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인 후 세상은 죽음의 벌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그 시간에,
언론은 죽은 이들이 받을 보상을 계산하는 기민함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적나라한 우리 사회의 민낯입니다.
돈 귀신이 이 땅을 휘젓고 다닙니다.
주님,
돈벌이를 위해 생명을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기업,
관리 감독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도 무사안일하게 대처해온 관료들,
위기에 빠진 이들을 버려두고 제 한 목숨 구하기 위한 달아난 사람들,
그리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구조의 임무를 방기한 사람들,
그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비용만 계산하고 있던 사람들,
실체적 진실을 보도하기 보다는 가십거리만 찾는 언론,
마치 남의 말을 하듯 다른 이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무능한 정부,
성급하게 값싼 화해와 용서를 권유하는 교회,
그리고 이런 현실에 눈을 감고 살아온 우리 모두를 엄히 꾸짖어주십시오.
하오나 주님,
우리는 이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위험 속으로 들어간 이들 말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벼랑 끝에서 오히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그들 속에서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위로를 얻습니다.
주님,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세월호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죽음이 헛되이 허비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일을 계기로 우리 문화가 생명중심의 문화로 변화되게 해주십시오.
저들의 억울한 죽음을 망각의 강물 속에 떠내려 보내지 않게 해주시고,
새로운 세상을 위한 주춧돌로 삼게 해주십시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진심으로 찬미할 수 있겠나이다.
에스겔의 해골 골짜기에 불어왔던 생기를 지금 우리에게도 보내주십시오.
아멘.
최근 정부에서는 세월호를 비용과 기타 문제로 인양하지 않으려 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눈씻고 찾아봐도 정부가 재발 방지에 대한 의지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희생자 유가족의 슬픔을 덜어주고자 하는 배려 또한 찾아볼 수 없구요. 주님께서 저들에게 권력을 주신 것은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걱정없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들은 자신들이 무얼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 기도가 작은 씨앗이 되길 소망합니다. 찢어지는 슬픔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치유하고, 우리 사회가 진실을 찾아가는 용기를 낼 수 있길 바랍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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