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벧후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정말 좋은 것이다. 베드로서에는 이 신앙을 두고 보배로운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보배로운 말씀이 우리 인생을 보배롭게 하기 때문에 신앙은 보배로운 것이다. 그런데 이 보배로운 것을 천박하게 만드는 것이 이단이며, 사이비신앙이다.
어떤게 이단인가? 난 요즘 행해지고 있는 이단 논쟁은 사절한다. 말 한마디 문구 하나에 신학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거기에 복잡한 교리를 가미하여 이단을 판정하는 식의 이단 논쟁은 잘못하면 마녀사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경우는 이단으로 낙인찍을 것이 아니라 토론과 학술적인 논쟁을 통해 얼마든지 좋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단은 신앙의 결과가 보여준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맺히듯이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면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이 되어진다. 사람의 품격이 높아지고, 삶의 생명력이 풍성해지며, 그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난다. 그래서 자연히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당신을 보니 나도 예수 믿고 싶어집니다.'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가기에 자기 스스로도 삶의 기쁨과 자부심이 넘쳐나게 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 덕에 행복해진다.
하지만 잘못된 신앙은 잘못된 결과를 낳는다. 이단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만해진다. 자기만이 가장 올바른 믿음을 갖고 있다는 근거없는 자부심을 갖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배타적인 모습을 가진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하나님을 기뻐하기 보다 두려움을 갖고 언제나 하나님의 눈치를 살핀다. 교주들은 이 두려움을 이용해서 그 사람들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그 인생을 조종한다. 그렇기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채 그 교주가 하라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기 바쁘다. 순종이라는 미명하에 자기 생각이 없이 맹목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이라고 하는 망상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반사회적인 모습을 띈다. 세상의 부적응자가 되든지, 반사회적이 된다. 신앙을 빌미로 가정을 등한시하고, 사회적인 책임에 소홀하며, 대인관계가 삐뚤어져 점점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간다. 배타적이 되고, 비인격적인 삶을 살게 되며,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이런 이단 사이비 신앙은 교회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도리어 밖에 있는 이단은 경계하기 쉽지만, 안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은 경계하기가 참 힘들다. 이들은 자신이 이단사이비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지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폐해가 더 크다. 이런 사람들 교회 밖에서 볼 때 기독교인이라고 하기 보다 "개독교"라고 이름 붙여 기독교 전체를 조롱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가 개독교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욕먹고 조롱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른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성령 안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내면을 살펴야 하고, 나의 행실을 살펴야 하고, 나의 성품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진심을 살펴야 하고, 주신 비전에 대한 헌신도를 살펴야 한다. 더욱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성령 안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과 행실이 정금같이 나오도록 갈고 닦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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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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