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 교육

기독교교육철학이 빈곤했던 해방 후의 주일학교교육

코이네 2017. 9. 22.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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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의 주일학교

 

 

해방이 되자 무너졌던 재단이 다수 수축되고 잠잠했던 주일학교 운동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그런 부흥이 일어났으나 북한은 그렇지 못했다. 1947년 1월 14일 서울에서 주일학교 재건 운동이 시작되었고, 1948년 조선주일학교 연합회라는 명칭은 “대한 기독교 교육협회”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는 1950년 전쟁으로 인해 일시 무너지고 말았으며, 1952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다시 재출발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주일학교 연합회”가 “대한 기독교 교육협회”로 개칭되고 사업을 계속하여 왔으나, 출판사업만을 주로 하여 온 까닭에 주일학교 운동이 개 교파별로 움직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 당시 주일학교는 교육철학에 근거한 원리가 빈곤하여, 어린이 설교와 동화가 구별됨 없이 사용되었고, 교회가 분열되면서 서로 다른 신학 노선으로 인해 교파별로 단독으로 계단공과가 발행되어 사용되었다. 1960년대 이후로도 이런 어려움은 계속 되었다. 교육신학적 이론과 교회교육의 현장과의 거리가 너무 넓었고, 한국교회의 상황에 맞는 교육신학이 정립되지 못해 교회교육은 그 방향성을 잃고 말았으며, 그 결과 교육내용의 빈곤, 교육시설의 미비, 교육방법의 혼란과 교사의 낙후성을 면할 수 없었으며, 특히 시골 교회의 교회학교 교육에는 적당한 교사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에 이르러 교역자들이 교육계획을 세울 수 없는 상태였다.

 

 

주일학교 교육에 대한 관심은 1970년와 1980년대에 급증하였다. 그 당시에는 교육에 대한 잡지들이 많이 창간되었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염려와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일학교 교육에 있어서 분명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발견하지 못했다. 더욱이 주일학교 무용론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존 웨스터호프는 1986년 제6회 연세대 주최 목회자 학위 세미나에서 주일학교의 종말을 여러차례 경고하였다. 오히려 현재는 관심의 부재상황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교계나 신학계에서조차 이런 주일학교 현실적 상황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갖거나 논평되어지는 일이란 찾아보기 힘든 지경에 놓여 있다.

 

또한 정부의 교육정책의 변화는 기독교 학교의 신앙교육 발전에 저해환경을 만들었다. 1950년대의 ‘홍인인간’론을 기점으로 강화되기 시작한 학교정책은 1969년에는 중학교 무시험 전형으로 바꾸었으며, 그것은 다시 1974년 교교 추첨제 시험으로, 그리고 1980년에는 대학입학 전형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고교 내신제가 채택되었다. 결국 이러한 정책변화는 넓게는 사립학교의 존립을 어렵게 했으며, 더욱이 건교이념 그 자체를 기독교교육에 두었던 기독교계 학교들은 점차 교육적 위기를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1969년 이후에는 성경을 희망하는 학생들에게만 가르치도록 지시되었으며, 고교추첨제 이후에는 성경교육을 과외로 옮겨야 하는 문제와 교목의 교사자격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고교내신제 이후에는 고교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 성경과목은 학생들로부터 점차 외면을 당하는 상황에까지 온 것이다. 이렇듯 기독교학교에의 기독교교육적 근거를 상실하기 시작한 것은 교회에서 시행하는 주일학교에도 직접, 간접적인 영향을 끼쳐온 것이다.

 
(* 이 글은 저의 석사학위 논문인 '교회학교 교사의 지도력 개발에 관한 연구'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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