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이레 그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
본문 : 창세기 22장 1절 19절
2016.3.6.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1.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오늘 본문은 참 설교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는데, 이런 명령을 내리는 하나님은 평소 우리가 알던 하나님과 너무 다른 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중동지역의 한 종교 중 몰렉을 섬기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장 큰 희생과 헌신의 상징으로 자신의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왜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아들조차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헌신을 하면 몰렉이라는 신이 자신들에게 엄청난 복을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들 하나 바쳐서 그 가족과 가문 그 나라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다면 아들 하나 희생시키는 것쯤은 괜찮다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몰렉의 신앙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레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율법으로 이런 짓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혹 제가 아브라함처럼 그런 명령을 들었다면 전 이 명령을 하는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고, 귀를 막아버릴 것입니다. 또 그런 명령을 하면 욕하고 저주하고, 나중에는 “사단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그렇게 물리쳐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명령이 정말 하나님이 하신 명령으로 알아듣고 순종합니다.
2. 시험하시는 하나님
도대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그 첫째 이유가 1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시험하다는 말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테스트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을 점검하고, 더 실력을 키우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유혹하는 것을 두고 시험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테스트하셔서 더 믿음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시며, 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시험하여 믿음에서 무너지도록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명령을 하시는 것은 그의 신앙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신앙을 점검하고 더 깊은 믿음으로 가도록 성장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브라함의 경우를 살펴보면 받는 신앙 자세에서 주는 신앙 자세로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일방적인 계약과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보호와 배려를 받았고, 그렇게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조금 더 성숙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요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리 귀하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제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것을 하나님을 위해 내어 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내어 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며, 사랑의 참 맛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나를 위해 무엇을 얻는데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남을 위해 나의 소중한 것을 기꺼이 기쁘게 내 놓을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것만을 가지고 있고자 하는 자는 참된 사랑을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도 체험할 수 없고, 또 그 사랑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나를 위해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줄 수 있는가를 질문합니다. 사람마다 소중한 것에 대한 견해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식이, 돈이, 시간이, 건강이,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더욱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이처럼 성장한다는 것은 잔인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장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아브라함의 순종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요구에 아브라함은 별 생각을 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해치지 않으며, 나를 불행하게 하지 않으며,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시샘하는 그런 졸렬한 분이 아니며, 사람의 생명을 불로 태워 재물로 받는 그런 무자비한 분이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얼토당토하지 않은 명령을 하셨을까?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합니다. 그래 드리자. 하나님이 달라 하시니 드리자.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닙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깊은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오해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결정 속에는 세 가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험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둘째는 누구의 것인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비록 내가 가졌더라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 정신입니다.
셋째는 누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올바로 사용되는 것이며, 가장 가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질 때 가장 가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을 달라하신 것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비로소 그것은 진정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즉 내가 지닐 때가 아니라 주님이 소유하실 때 그것이 물건이든 인생이든 생명이든 참된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고자 할 때 하나님은 그 손을 막으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
여러분,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제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정도 되어야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이로 보면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참 잔인합니다. 그러나 이 시험을 이기면 이 믿음은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은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다.
여러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막아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인간의 피, 인간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바로 절대적인 믿음과 그에 따른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번제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막으셔서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그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들을 위해 그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 죄 없으신 예수님의 죽음으로야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울부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엘리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저도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키워보니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오늘 본문을 읽었을 땐 어찌 아비가 지 살자고 아들을 바치는가? 어떻게 이런 잔혹무도한 사람을 성경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녀를 낳아 키워보니 자녀의 생명은 곧 아버지의 생명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했을 때 이삭의 생명에는 이미 그 아버지의 생명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절규하시며 고통스럽게 죽으실 때 그 십자가에는 이미 아버지 하나님의 생명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인인 우리를 살리셨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이삭 대신 숫양을 준비시켜두셨지만 정작 그 아들인 예수께서 죽으실 땐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제물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롯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죄인들의 목숨을 대신하게 하셨고,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이레, 그 제단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헌신 그리고 사랑의 제단이었지만, 또한 그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결심과 사랑이 숨어 있는 제단이었습니다.
우리 소토교회 성도들도 그 깊은 믿음과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길 축원합니다. (*)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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