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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7장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신 홍수 심판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방주가 다 만들어지자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 모두 방주로 들어가라 명하셨고, 짐승들도 들어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짐승의 수에 관해 차이가 납니다. 정결한 짐승에 속하는 종들은 암수 일곱씩, 그렇지 않은 것은 암수 둘씩, 그리고 조류도 둘씩을 취하여 방주에 들어가게 하고, 이를 통해 나중에 짐승들의 명맥을 이어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같은 이야기가 비슷하게 반복되면서 암수 둘씩 들어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신학자들은 몇 가지의 대답을 각기 내어놓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의 전승설입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는 모세가 기록했다고 해서 모세오경이고, 나머지는 각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되어 나중에 이 모든 것들이 유대의 율법학자들에 의해 집대성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일련의 신학자들은 성경은 구전으로 전승되어져 왔고, 이것이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이주했을 때 그곳에 잡혀간 율법학자들에 의해 집대성 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크게 4가지의 화자를 발견해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전해내려온 계층이 최소 4개는 된다는 것이고, 그 계층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정신은 이런 차이나는 것을 억지로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전되어진 그대로 그것을 가감없이 기록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같은 사건을 두고도 조금씩 다른 내용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둘째는 시간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가 방주를 다 완성했을 때와 비를 내리게 하신 때에는 시간적인 차이가 꽤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곱이었다가 나중에는 다시 둘로 정리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보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이런 점이 상당히 궁금한 것인데, 당시 성경을 듣는 사람들은 이것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대단한 홍수 후에 어떻게 인류가 계속 이어지고, 또 땅에 사는 생물들이 멸종하지 않고 이렇게 번성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더 재밌는 발상을 합니다. 이 노아의 방주에 실린 동물들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한 아이가 손을 들어 질문하더군요.
"목사님 팽귄은 왔나요? 그건 남극에 살고 다리도 짧은데 어떻게 왔을까요? 그리고 공룡은요? 공룡은 너무 커서 방주에 들어가기 힘들었을텐데.."
ㅎㅎ 대답하기 난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되물었습니다.
"글쎄다, 걔들은 어떻게 왔을까?"
그러자 아이들은 특유의 상상의 나래를 펴고, 나름대로 추정하는데, 제가 듣기엔 다 그럴싸해 보였습니다. 성경을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고 읽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정답이야 없겠지만 그런 우리의 생각들을 통해 우린 좀 더 풍성하게 성경의 내용들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아주 얼토당토 않은 그런 공상을 하는 것은 삼가해야 하고, 또 억지로 꿰 맞추어 자기 편리한 대로 성경을 이용하려고 하는 태도도 버려야겠죠.
성경을 보면 방주의 문이 닫힌 후 7일째가 되어서야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며, 비는 무려 40일을 계속해서 내렸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비만 온 것이 아니라 땅의 깊은 샘도 함께 터져 세상은 그야말로 물바다가 된 것이죠. 40일쯤 비가 내리니 그 물이 땅에 차올라서 가장 높은 산보다 15규빗 그러니까 약 7미터 이상 차올랐다고 합니다. 그 때 방주가 물위에 떠다니기 시작하고, 그렇게 비가 그친 후 150일동안 물이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타락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타락하고 더렵혀지고 오염되어서 더이상 세상이 존립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 세상을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사람만 곤란해질 뿐만 아니라 자연생태계마저도 그 존립이 위태롭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길가에 자라있는 잡풀 하나에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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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7장, 노아의 방주와 홍수,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과 동물들
창세기 7장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신 홍수 심판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방주가 다 만들어지자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 모두 방주로 들어가라 명하셨고, 짐승들도 들어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짐승의 수에 관해 차이가 납니다. 정결한 짐승에 속하는 종들은 암수 일곱씩, 그렇지 않은 것은 암수 둘씩, 그리고 조류도 둘씩을 취하여 방주에 들어가게 하고, 이를 통해 나중에 짐승들의 명맥을 이어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같은 이야기가 비슷하게 반복되면서 암수 둘씩 들어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신학자들은 몇 가지의 대답을 각기 내어놓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의 전승설입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는 모세가 기록했다고 해서 모세오경이고, 나머지는 각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되어 나중에 이 모든 것들이 유대의 율법학자들에 의해 집대성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일련의 신학자들은 성경은 구전으로 전승되어져 왔고, 이것이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이주했을 때 그곳에 잡혀간 율법학자들에 의해 집대성 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크게 4가지의 화자를 발견해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전해내려온 계층이 최소 4개는 된다는 것이고, 그 계층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정신은 이런 차이나는 것을 억지로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전되어진 그대로 그것을 가감없이 기록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같은 사건을 두고도 조금씩 다른 내용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둘째는 시간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가 방주를 다 완성했을 때와 비를 내리게 하신 때에는 시간적인 차이가 꽤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곱이었다가 나중에는 다시 둘로 정리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보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이런 점이 상당히 궁금한 것인데, 당시 성경을 듣는 사람들은 이것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대단한 홍수 후에 어떻게 인류가 계속 이어지고, 또 땅에 사는 생물들이 멸종하지 않고 이렇게 번성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많은 동물들이 방주에 초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더 재밌는 발상을 합니다. 이 노아의 방주에 실린 동물들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한 아이가 손을 들어 질문하더군요.
"목사님 팽귄은 왔나요? 그건 남극에 살고 다리도 짧은데 어떻게 왔을까요? 그리고 공룡은요? 공룡은 너무 커서 방주에 들어가기 힘들었을텐데.."
ㅎㅎ 대답하기 난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되물었습니다.
"글쎄다, 걔들은 어떻게 왔을까?"
그러자 아이들은 특유의 상상의 나래를 펴고, 나름대로 추정하는데, 제가 듣기엔 다 그럴싸해 보였습니다. 성경을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고 읽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정답이야 없겠지만 그런 우리의 생각들을 통해 우린 좀 더 풍성하게 성경의 내용들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아주 얼토당토 않은 그런 공상을 하는 것은 삼가해야 하고, 또 억지로 꿰 맞추어 자기 편리한 대로 성경을 이용하려고 하는 태도도 버려야겠죠.
성경을 보면 방주의 문이 닫힌 후 7일째가 되어서야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며, 비는 무려 40일을 계속해서 내렸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비만 온 것이 아니라 땅의 깊은 샘도 함께 터져 세상은 그야말로 물바다가 된 것이죠. 40일쯤 비가 내리니 그 물이 땅에 차올라서 가장 높은 산보다 15규빗 그러니까 약 7미터 이상 차올랐다고 합니다. 그 때 방주가 물위에 떠다니기 시작하고, 그렇게 비가 그친 후 150일동안 물이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타락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타락하고 더렵혀지고 오염되어서 더이상 세상이 존립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 세상을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사람만 곤란해질 뿐만 아니라 자연생태계마저도 그 존립이 위태롭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길가에 자라있는 잡풀 하나에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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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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