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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8장입니다.
이 땅이 홍수로 인해 물로 뒤덮였을 때 노아 가족과 짐승들이 함께 탄 방주는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8장 1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방주에 있는 사람들과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셔서 바람을 일으켜 물이 빠지는 시간이 단축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권념하다는 말은 그 처지와 형편을 깊이 생각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에 있는 가족들과 짐승들의 처지를 깊이 생각하셔서 계속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고 판단하셔서 적극적으로 땅에 있는 물을 빼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조금만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40일동안 비가 와서 방주에 꼼짝 없이 갇혀 있었죠? 비가 그쳐서 밖에 나올 수는 있었지만 방주의 특성상 다른 배처럼 그렇게 활보할 순 없는 구조 아닙니까? 노아의 가족들 모두 배를 처음 탔으니 멀미도 엄청났을 것이고, 또 방주 안에 온갖 짐승들이 있어서 계속 먹어대고 싸대고 했을텐데, 그 냄새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리고 한 배에 사자와 사슴이 같이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님 곰과 사자, 사자와 호랑이가 같이 있었다면 그 긴장감 대단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도 가축도 점점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 자명한 것이죠.
하나님은 이런 처지를 이해하셨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이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바로 권념하는 분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홍수로 온 세상을 멸망시키는 분이시지만 또한 그 마음 속에는 인간의 처지와 모든 생물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시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애써 주시는 자상한 분이라는 사실이죠.
이제 비가 그치고 높은 산의 봉우리들이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노아는 물이 빠지는 것은 알았지만 어느정도나 빠졌는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방주가 아라랏 산이라고 하는 높은 봉우리에 걸리고 맙니다. 이거 진퇴양난이 된 것이죠. 나갈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고.
그래서 먼저 힘이 좋은 까마귀를 내 보냈습니다. 까마귀는 용맹하기도 하고, 또한 힘도 장사입니다. 그래서 먼 거리를 날아갈 수 있기에 이런 특명을 할 수 있는 아주 적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몇 일을 땅과 방주를 오가며 노아에게 정보를 제공하다 그만 까마귀는 제 살길을 찾아가버린 것 같습니다. 힘이 있으니 멀리 갈 수 있고, 그렇기에 제 살길을 찾아나선 것이죠.
그 다음으로는 비둘기를 내어보냈습니다. 비둘기도 먼 거리를 날아다닐 수 있지만 까마귀처럼 용맹하지 못하니 방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돌아온 비둘기를 칠 일 뒤에 다니 내 보냈더니 감람잎사귀를 물어왔는데, 새순을 물어왔습니다. 이는 물이 감람나무가 자랄 수 있는 낮은 땅까지 물이 빠진 것이고, 새순이 돋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하죠.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제치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이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밖으로 나온 노아는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제물은 정결한 짐승과 새를 택하였고, 제단을 쌓아 이 짐승들을 불태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받으셨고, 다시는 인간들을 이런 방식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노아가 택한 제물은 아마 방주에 있는동안 새끼를 낳은 종이었겠죠. 아님 그 때문에 한 종이 멸종하는데, 그런 짓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8장을 보면 다음 네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까도 말했듯이 하나님은 권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냉혈한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함께 갖고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힘세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어야 좋다는 것을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비둘기의 그 새순을 물은 모습은 전 세계에 평화를 상징하는 모습이 되지 않습니까? 자기 잘나고 힘센 존재보다는 남을 이롭게 하는 존재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셋째는 노아를 보면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을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사태를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죠. 노아는 아주 지혜롭게 대처했습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이용하고 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참 생각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마음이 풀어지신 하나님, 그저 작은 바람이 있다면 하나님께 걱정이나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덕이 되고,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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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8장, 노아의 방주와 홍수,
그리고 까마귀와 비둘기
창세기 8장입니다.
이 땅이 홍수로 인해 물로 뒤덮였을 때 노아 가족과 짐승들이 함께 탄 방주는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8장 1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방주에 있는 사람들과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셔서 바람을 일으켜 물이 빠지는 시간이 단축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권념하다는 말은 그 처지와 형편을 깊이 생각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에 있는 가족들과 짐승들의 처지를 깊이 생각하셔서 계속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고 판단하셔서 적극적으로 땅에 있는 물을 빼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조금만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40일동안 비가 와서 방주에 꼼짝 없이 갇혀 있었죠? 비가 그쳐서 밖에 나올 수는 있었지만 방주의 특성상 다른 배처럼 그렇게 활보할 순 없는 구조 아닙니까? 노아의 가족들 모두 배를 처음 탔으니 멀미도 엄청났을 것이고, 또 방주 안에 온갖 짐승들이 있어서 계속 먹어대고 싸대고 했을텐데, 그 냄새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리고 한 배에 사자와 사슴이 같이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님 곰과 사자, 사자와 호랑이가 같이 있었다면 그 긴장감 대단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도 가축도 점점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 자명한 것이죠.
하나님은 이런 처지를 이해하셨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이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바로 권념하는 분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홍수로 온 세상을 멸망시키는 분이시지만 또한 그 마음 속에는 인간의 처지와 모든 생물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시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애써 주시는 자상한 분이라는 사실이죠.
아라랏산은 터키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이란과 아르메니아와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사화산(死火山)이다.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돌출하는 해발 5,137m의 고산이며, 대(大)아르메니아 봉과 소(小)아르메니아 봉(3,896m)이 있다
이제 비가 그치고 높은 산의 봉우리들이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노아는 물이 빠지는 것은 알았지만 어느정도나 빠졌는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방주가 아라랏 산이라고 하는 높은 봉우리에 걸리고 맙니다. 이거 진퇴양난이 된 것이죠. 나갈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고.
그래서 먼저 힘이 좋은 까마귀를 내 보냈습니다. 까마귀는 용맹하기도 하고, 또한 힘도 장사입니다. 그래서 먼 거리를 날아갈 수 있기에 이런 특명을 할 수 있는 아주 적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몇 일을 땅과 방주를 오가며 노아에게 정보를 제공하다 그만 까마귀는 제 살길을 찾아가버린 것 같습니다. 힘이 있으니 멀리 갈 수 있고, 그렇기에 제 살길을 찾아나선 것이죠.
평화의 상징으로 까마귀가 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 다음으로는 비둘기를 내어보냈습니다. 비둘기도 먼 거리를 날아다닐 수 있지만 까마귀처럼 용맹하지 못하니 방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돌아온 비둘기를 칠 일 뒤에 다니 내 보냈더니 감람잎사귀를 물어왔는데, 새순을 물어왔습니다. 이는 물이 감람나무가 자랄 수 있는 낮은 땅까지 물이 빠진 것이고, 새순이 돋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하죠.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제치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이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밖으로 나온 노아는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제물은 정결한 짐승과 새를 택하였고, 제단을 쌓아 이 짐승들을 불태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받으셨고, 다시는 인간들을 이런 방식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노아가 택한 제물은 아마 방주에 있는동안 새끼를 낳은 종이었겠죠. 아님 그 때문에 한 종이 멸종하는데, 그런 짓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8장을 보면 다음 네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까도 말했듯이 하나님은 권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냉혈한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함께 갖고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힘세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어야 좋다는 것을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비둘기의 그 새순을 물은 모습은 전 세계에 평화를 상징하는 모습이 되지 않습니까? 자기 잘나고 힘센 존재보다는 남을 이롭게 하는 존재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셋째는 노아를 보면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을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사태를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죠. 노아는 아주 지혜롭게 대처했습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이용하고 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참 생각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마음이 풀어지신 하나님, 그저 작은 바람이 있다면 하나님께 걱정이나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덕이 되고,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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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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