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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9장 후반부입니다.
이제 홍수가 끝난 후 세상은 다시 평화로워지고, 인간세상은 노아의 가족들로 인해 점점 번성해갑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 가족들은 농사를 지으며 그 수확을 얻으며 살았고, 그 중 포도나무를 키우기도 했습니다. 포도나무를 키우니 자연 이것을 이용하는 다양한 방법도 개발해내었고, 그 중 포도로 술을 빚는 법도 익혔을 것입니다. 이 포도주를 노아는 즐겼습니다.
포도주를 즐기는 노아의 행동이 한 편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온 세상에 남은 사람은 자기 가족들 뿐이고, 모든 것이 홍수에 쓸려가 버렸으니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고, 뭔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문화나 다른 기쁨도 없고, 그저 눈만 뜨면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이 반복되지 않습니까? 게다가 간간히 예전 그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온 신경을 곤두서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런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술은 좋은 위안거리가 되었고, 또 그것을 즐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술이란게 참 묘한 것입니다. 적당히 그 술을 조절할 수 있을 때는 참 좋은 벗이 되지만 결코 그렇게 인간을 내버려두질 않습니다. 처음에는 먹고 싶을 때 적당히 먹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습관적으로 먹게 됩니다. 술의 독성이 몸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술기운이 있어야 몸이 움직여지고, 먹는 양이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야 취기가 오르거든요. 그러다 보면 사람이 술을 먹는 것이 아니라 술이 술을 먹고, 마침내는 술이 사람을 먹어버리게 되죠. 이렇게 술이 찌들다보면 행동도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아져 원숭이처럼 까불다가 사자처럼 용맹스럽게 되죠. 그러다가 돼지처럼 자기가 뱉은 오물에 몸을 비비며 몸과 마음을 더렵혀 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일들을 벌이게 됩니다. 하지 않아야 할 짓을 대담하게 저지르게 되기도 하고, 여러가지 실수를 하게 되며, 이상한 습관에 길들여져서 마침내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됩니다.
노아도 예외는 아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대의 의인이라고 칭송할만큼 훌륭한 인격과 영성을 소유한 노아였지만 그도 술에 맛을 들인 후부터 점점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술을 마시면 취해서 잠이 들 정도로 폭음을 일삼았고, 만취된 후에는 옷을 다 벗어버린 채 침상에 누워 잠이 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다는 대목에서 원어에는 이 포도주에 정관사를 붙였습니다. 즉 그가 어쩌다가 술을 먹은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마셨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의 장막에서 그렇게 벌거벗고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고는 두 형제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성경의 원어대로 한다면 그저 흘낏 본 것이 아니라 아주 대놓고 보았고,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형제들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셈과 야벳은 바로 아버지의 장막에 들어갔고,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뒤돌아섰고, 둘이 아버지의 옷을 잡아 뒷걸음질 쳐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덮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아버지를 얼마나 공경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겠죠.
노아가 술이 깬 후 자초지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보통 아버지라면 좀 부끄러워하면서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할터인데, 노아는 대놓고 자신을 공경한 두 아들은 축복하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까발린 둘째 아들은 저주해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아들이 한 짓이 미워도 어찌 이렇게 저주할 수 있을까? 사실 그런 의문이 들더군요. 그런데, 축복과 저주에 있어서 성경의 인물들은 대부분 이렇게 노아와 같이 냉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이 두 아들 에서와 야곱에게 한 것도 그렇고, 야곱이 그 열두 아들을 임종전에 축복한 내용도 보면 그렇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축복과 저주는 인간이 임의대로 말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축복과 저주의 순간은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축복과 저주를 빌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의 행위를 보시고 하나님은 이렇게 판단하신 것입니다. 셈과 야벳은 아들로 그 할 도리를 제대로 했기에 복을 받아 마땅하고, 함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노아가 내뱉은 말을 보면 셈과 야벳은 아들로서 대하며 그들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찬송이 되고, 창대하게 될 것이며, 서로 연합해서 화목하게 지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함은 노예가 된다고 말합니다. 즉 함의 행동은 아들이 아니라 노예나 해야 할 짓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부모님에 대한 공경도 없고, 단지 노예와 주인의 사이처럼 그렇게 무책임하고, 애정이 없는 불효막심한 짓을 저질렀다고 보신 것입니다.
후대에 성경을 자기 입맛대로 이용해 먹는 사람들은 함이 흑인의 선조라는 점을 이용해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성경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희안한 주장을 해서 엄청난 비극을 만들었습니다만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들로서 살 것인가? 이는 우리의 부모에게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받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를 섬기는 태도에서도 동일한 요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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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9장, 포도주에 취해 벌거벚은 노아와 저주받은 가나안
창세기9장 후반부입니다.
이제 홍수가 끝난 후 세상은 다시 평화로워지고, 인간세상은 노아의 가족들로 인해 점점 번성해갑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 가족들은 농사를 지으며 그 수확을 얻으며 살았고, 그 중 포도나무를 키우기도 했습니다. 포도나무를 키우니 자연 이것을 이용하는 다양한 방법도 개발해내었고, 그 중 포도로 술을 빚는 법도 익혔을 것입니다. 이 포도주를 노아는 즐겼습니다.
포도주를 즐기는 노아의 행동이 한 편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온 세상에 남은 사람은 자기 가족들 뿐이고, 모든 것이 홍수에 쓸려가 버렸으니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고, 뭔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문화나 다른 기쁨도 없고, 그저 눈만 뜨면 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이 반복되지 않습니까? 게다가 간간히 예전 그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온 신경을 곤두서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런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술은 좋은 위안거리가 되었고, 또 그것을 즐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술이란게 참 묘한 것입니다. 적당히 그 술을 조절할 수 있을 때는 참 좋은 벗이 되지만 결코 그렇게 인간을 내버려두질 않습니다. 처음에는 먹고 싶을 때 적당히 먹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습관적으로 먹게 됩니다. 술의 독성이 몸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술기운이 있어야 몸이 움직여지고, 먹는 양이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야 취기가 오르거든요. 그러다 보면 사람이 술을 먹는 것이 아니라 술이 술을 먹고, 마침내는 술이 사람을 먹어버리게 되죠. 이렇게 술이 찌들다보면 행동도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아져 원숭이처럼 까불다가 사자처럼 용맹스럽게 되죠. 그러다가 돼지처럼 자기가 뱉은 오물에 몸을 비비며 몸과 마음을 더렵혀 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일들을 벌이게 됩니다. 하지 않아야 할 짓을 대담하게 저지르게 되기도 하고, 여러가지 실수를 하게 되며, 이상한 습관에 길들여져서 마침내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됩니다.
노아도 예외는 아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대의 의인이라고 칭송할만큼 훌륭한 인격과 영성을 소유한 노아였지만 그도 술에 맛을 들인 후부터 점점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술을 마시면 취해서 잠이 들 정도로 폭음을 일삼았고, 만취된 후에는 옷을 다 벗어버린 채 침상에 누워 잠이 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다는 대목에서 원어에는 이 포도주에 정관사를 붙였습니다. 즉 그가 어쩌다가 술을 먹은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마셨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술취한 노아
그러던 어느 날,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의 장막에서 그렇게 벌거벗고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고는 두 형제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성경의 원어대로 한다면 그저 흘낏 본 것이 아니라 아주 대놓고 보았고,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형제들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셈과 야벳은 바로 아버지의 장막에 들어갔고,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뒤돌아섰고, 둘이 아버지의 옷을 잡아 뒷걸음질 쳐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덮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아버지를 얼마나 공경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겠죠.
노아가 술이 깬 후 자초지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보통 아버지라면 좀 부끄러워하면서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할터인데, 노아는 대놓고 자신을 공경한 두 아들은 축복하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까발린 둘째 아들은 저주해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아들이 한 짓이 미워도 어찌 이렇게 저주할 수 있을까? 사실 그런 의문이 들더군요. 그런데, 축복과 저주에 있어서 성경의 인물들은 대부분 이렇게 노아와 같이 냉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이 두 아들 에서와 야곱에게 한 것도 그렇고, 야곱이 그 열두 아들을 임종전에 축복한 내용도 보면 그렇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축복과 저주는 인간이 임의대로 말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축복과 저주의 순간은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축복과 저주를 빌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의 행위를 보시고 하나님은 이렇게 판단하신 것입니다. 셈과 야벳은 아들로 그 할 도리를 제대로 했기에 복을 받아 마땅하고, 함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노아가 내뱉은 말을 보면 셈과 야벳은 아들로서 대하며 그들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찬송이 되고, 창대하게 될 것이며, 서로 연합해서 화목하게 지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함은 노예가 된다고 말합니다. 즉 함의 행동은 아들이 아니라 노예나 해야 할 짓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부모님에 대한 공경도 없고, 단지 노예와 주인의 사이처럼 그렇게 무책임하고, 애정이 없는 불효막심한 짓을 저질렀다고 보신 것입니다.
후대에 성경을 자기 입맛대로 이용해 먹는 사람들은 함이 흑인의 선조라는 점을 이용해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성경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희안한 주장을 해서 엄청난 비극을 만들었습니다만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들로서 살 것인가? 이는 우리의 부모에게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받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를 섬기는 태도에서도 동일한 요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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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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