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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장입니다.
노아의 자손들이 온 세계에 퍼져서 점점 인류가 번성하게 되자, 그들의 과학과 문화는 점점 발달하게 됩니다. 그렇게 과학이 발달하자 사람들은 또 한 가지의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바로 높은 탑을 쌓아올리는 것이죠. 이 유는 세 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들은 탑을 쌓아올리면서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분석해보면 탑을 세우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죠.
첫째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혜를 뽐내기 위해서입니다. 지식이 쌓이고 지혜가 발달하게 되니 이들은 점점 자신들이 한계를 자신들의 능력으로 극복해보고 싶어합니다. 도전 의식이 생기는 것이죠. 그리고 그 끝을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둘째는 자신들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는 말은 이 땅에 뭔가 자신들의 흔적과 업적을 남겨두고 싶은 욕구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 속담에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자신의 업적과 흔적을 이 땅에 두고 싶은 욕망때문에 이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홍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은 무지개의 언약으로 사람들에게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홍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홍수를 사람의 능력으로 극복하고자 시도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리 비가 와도 잠기지 않는 하늘에 닿는 높은 대를 쌓아서 피신하자는 것이고, 또 혹시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이 탑을 보고 다시 모여살자는 것입니다. 즉 이 탑인 인류의 구심점이 되게 하는 것이죠.
그럼 탑을 쌓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벽돌입니다. 사실 노아의 홍수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몰라도 성경의 기록대로 한다면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10대이고, 그 시간을 1천년 정도로 잡는다면 기원전 3천년정도입니다. 아브라함과 우리 단군할아버지가 역사적으로 비슷한 시기의 사람입니다. 단군할아버지가 태어나기 1천년 전에 벌써 벽돌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죠. 벽돌은 돌과 달라서 일종의 규격화 된 제품입니다. 즉 건물을 지을 때 이미 이 당시에 나름의 표준화를 이루었고, 돌 대신 흙으로 얼마든지 건축 자재를 생산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 기술력이 높은 탑을 쌓은 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탑을 쌓을 당시의 모습이나 지금 현대인의 삶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어보입니다. 우리도 삶을 살아가는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바벨을 쌓은 목적을 벗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과시해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해보고, 신의 영역에 도전해서 스스로 신이 되어보고자 하는 것,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내고 업적을 이루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죠.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사람의 능력으로 어떻게 해보고 싶어 하는 모습까지 딱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와가 마귀에게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었고, 이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며,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을 앓게 된 것이 여기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죠. 인간은 이전보다 점 더 적극적으로 그런 뜻을 이루어보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들의 노력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셨을까요? 성경의 기록된 대로 살펴본다면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 잘못되면 인간들이 하는 짓을 더이상 막기도 어려울 것 같다는 다소 비관적인 목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하신 작업이 바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게 하였고, 그 결과 사람들은 더이상 바벨탑을 지을 수가 없었고, 탑은 건설하다가 중간에 그만두게 된 미완성작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바벨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흩었다는 뜻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은 것을 그냥 두고만 보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간들은 그들의 의도대로 그 탑을 완성시켰을까요? 그리고 그 탑이 완성되었다면 또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기에 대한 상상은 우리 현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숙제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없이도 우리 인간들끼리 잘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역을 도전해서 정복해보고 싶은 것이죠. 그래서 수많은 과학이 발전되고 있고, 인간들은 자신들이 처해진 환경을 끊임없이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과 다음에는 꼭 붙는 말이 "정복하다"는 말을 쓰죠.
우리 인간들이 그저 가지고 있는 지혜와 능력을 십분발휘해서 아무 제약없이 과학을 발전시켜나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황우석 박사의 말처럼 줄기세포로 인해 사람들은 불치병도 치료되고, 또 죽음의 문제도 극복해갈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그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너무도 복잡한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특히 인간을 살리고자 하는 과학이 인간성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예전에 브레이크가 파열된 폭주하는 기관차를 세우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이 기관차가 멈추지 않고 돌진해가니까 어떤 사람이 발악을 하듯 절규하더군요. "누가 이 차 좀 세워주세요"
만일 하나님이 그 때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케해서 바벨탑 쌓는 걸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또 다시 폭주하지 않았을까요? 인간의 삶에 하나님이 없이 산다면 바로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다는 것을 바벨탑 사건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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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1장, 바벨탑과 언어의 혼란
창세기 11장입니다.
노아의 자손들이 온 세계에 퍼져서 점점 인류가 번성하게 되자, 그들의 과학과 문화는 점점 발달하게 됩니다. 그렇게 과학이 발달하자 사람들은 또 한 가지의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바로 높은 탑을 쌓아올리는 것이죠. 이 유는 세 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들은 탑을 쌓아올리면서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분석해보면 탑을 세우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죠.
첫째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혜를 뽐내기 위해서입니다. 지식이 쌓이고 지혜가 발달하게 되니 이들은 점점 자신들이 한계를 자신들의 능력으로 극복해보고 싶어합니다. 도전 의식이 생기는 것이죠. 그리고 그 끝을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둘째는 자신들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는 말은 이 땅에 뭔가 자신들의 흔적과 업적을 남겨두고 싶은 욕구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 속담에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자신의 업적과 흔적을 이 땅에 두고 싶은 욕망때문에 이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홍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은 무지개의 언약으로 사람들에게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홍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홍수를 사람의 능력으로 극복하고자 시도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리 비가 와도 잠기지 않는 하늘에 닿는 높은 대를 쌓아서 피신하자는 것이고, 또 혹시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이 탑을 보고 다시 모여살자는 것입니다. 즉 이 탑인 인류의 구심점이 되게 하는 것이죠.
그럼 탑을 쌓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벽돌입니다. 사실 노아의 홍수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몰라도 성경의 기록대로 한다면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10대이고, 그 시간을 1천년 정도로 잡는다면 기원전 3천년정도입니다. 아브라함과 우리 단군할아버지가 역사적으로 비슷한 시기의 사람입니다. 단군할아버지가 태어나기 1천년 전에 벌써 벽돌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죠. 벽돌은 돌과 달라서 일종의 규격화 된 제품입니다. 즉 건물을 지을 때 이미 이 당시에 나름의 표준화를 이루었고, 돌 대신 흙으로 얼마든지 건축 자재를 생산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 기술력이 높은 탑을 쌓은 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탑을 쌓을 당시의 모습이나 지금 현대인의 삶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어보입니다. 우리도 삶을 살아가는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바벨을 쌓은 목적을 벗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과시해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해보고, 신의 영역에 도전해서 스스로 신이 되어보고자 하는 것,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내고 업적을 이루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죠.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사람의 능력으로 어떻게 해보고 싶어 하는 모습까지 딱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와가 마귀에게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었고, 이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며,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을 앓게 된 것이 여기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죠. 인간은 이전보다 점 더 적극적으로 그런 뜻을 이루어보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들의 노력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셨을까요? 성경의 기록된 대로 살펴본다면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 잘못되면 인간들이 하는 짓을 더이상 막기도 어려울 것 같다는 다소 비관적인 목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하신 작업이 바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게 하였고, 그 결과 사람들은 더이상 바벨탑을 지을 수가 없었고, 탑은 건설하다가 중간에 그만두게 된 미완성작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바벨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흩었다는 뜻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은 것을 그냥 두고만 보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간들은 그들의 의도대로 그 탑을 완성시켰을까요? 그리고 그 탑이 완성되었다면 또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기에 대한 상상은 우리 현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숙제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없이도 우리 인간들끼리 잘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역을 도전해서 정복해보고 싶은 것이죠. 그래서 수많은 과학이 발전되고 있고, 인간들은 자신들이 처해진 환경을 끊임없이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과 다음에는 꼭 붙는 말이 "정복하다"는 말을 쓰죠.
우리 인간들이 그저 가지고 있는 지혜와 능력을 십분발휘해서 아무 제약없이 과학을 발전시켜나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황우석 박사의 말처럼 줄기세포로 인해 사람들은 불치병도 치료되고, 또 죽음의 문제도 극복해갈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그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너무도 복잡한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특히 인간을 살리고자 하는 과학이 인간성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예전에 브레이크가 파열된 폭주하는 기관차를 세우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이 기관차가 멈추지 않고 돌진해가니까 어떤 사람이 발악을 하듯 절규하더군요. "누가 이 차 좀 세워주세요"
만일 하나님이 그 때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케해서 바벨탑 쌓는 걸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또 다시 폭주하지 않았을까요? 인간의 삶에 하나님이 없이 산다면 바로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다는 것을 바벨탑 사건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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