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신 하나님

코이네 2017. 3.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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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신 하나님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이 누구인가?

 

예수님은 로고스이신 하나님이 육신인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육신하셨다고 하며, 영어로는 "incanation"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신 이유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함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육신하셔서, 우리에게 그 영광을 보여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은 곧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집니다.

이를 정리해보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딴 이름을 이사야서에는 임마누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선포는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주는 선언입니다. 충격적일뿐 아니라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1~2세기 헬레니즘 시대에 로마그리스소아시아이집트 등지에 널리 퍼져 있던 사상입니다. 그노시스󰡑는 지식 특히 영지(靈知)- 영에 대한 지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들은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창조주와 예수가 말한 아버지 하느님을 구별하여, 전자를 데미우르고스(제작자란 뜻)라는 하급 신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또 우주가 이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취한 육신은 참 육신이 아니고 가짜였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영()의 힘으로 육체를 벗어나 영화(靈化)되는 데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영지주의 이단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이단이 당시에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의 신에 대한 생각이 이와 비슷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들을 향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런 영지주의적인 생각은 당시의 사람들이 신은 육신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전혀 관심이 없는 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그 속에는 많은 신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을 보면 신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은 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신은 인간의 일에 인간은 신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며, 별관심도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지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관계를 맺는 정도입니다. 조금 예외적인 것이 있다면 사랑의 신인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테우스나 사랑의 신 큐피터 이야기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도 신들의 생활 속에서 빚어지는 신들의 이야기이지, 신이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거나 동정하거나 구원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즉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타나는 신은 인간세계의 일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토속 종교에서는 이것이 더 심각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올해 초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난 것을 읽었습니다. 한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이 남자가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무당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는데 이 무당의 이야기가 부적을 쓰면 된다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비싼 돈을 들여 부적을 썼지만, 이혼은커녕 그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도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적이 효험이 없다고 했더니 하는 말이 그러면 굿을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백만원을 주고 굿을 했는데, 하고 난 뒤 보니 도리어 그 부부는 예전보다 금술이 더 좋아져서 도저히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굿도 소용이 없었으니 돈을 돌려달라고 무당을 찾아갔더랍니다. 무당이 돈을 주었겠습니까? 그래서 법정에 소송을 걸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이 신은 돈만 주면 무엇이든지 해주는 신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신에 대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신을 상상하고 만들어낸 것이며, 또한 마귀를 하나님으로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 젖어있고, 익숙해 있으며, 또 이를 환영합니다. 내가 필요할 때 내 필요대로 움직여질 수 있고, 내 이기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신,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얼마간의 대가를 지불하면 되는, 참으로 편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욕망에 죄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충격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간여하시고, 간섭하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관여한다는 것, 사실 욕망에 사로잡혀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되는지 모릅니다.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괴롭고 또한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며 그 삶에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변화가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만,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괴로움도 따르는 것입니다.

 

가이드 포스트 11월호에 이런 글이 실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 오클라호마에 살고 있는 프란츠란 여인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수기입니다. 어렸을 때 참 가난한 시절을 경험한 프란츠 여사는 항상 남이 입었던 옷을 어머니가 수선해준 것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특별한 날 어머니는 새 옷감을 가져와서 직접 새옷을 만들어 주셨는데, 이 옷을 입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같은 학급에 헬렌이라는 다른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프란츠는 이 아이에게 친구가 되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초대도 하고 함께 공부도 하고 그랬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프란츠는 헬렌에게 예쁜 옷을 선물해주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헬렌은 일년 내내 딱 한 가지 옷만 입고 다녔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는 다른 여벌의 옷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자신의 이런 희망을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이런 제안을 합니다. 지금 너를 위해 성탄절 선물로 빨간 새 옷을 만들고 있는데, 이것을 헬렌에게 주고, 너는 사촌이 준 체크무늬의 옷을 수선해서 주면 안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탄절이 되었습니다. 헬렌을 집으로 초대하였고, 언니들과 함께 식사를 한 후 이제 서로에게 선물을 나누는 시간이 되자 어머니는 프란츠를 방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거기에는 예쁜 빨간 새옷과 수선한 체크무늬의 옷이 놓여져 있습니다. 프란츠는 얼른 빨간 새옷을 집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리속에 이제껏 엄마가 그녀를 위해 만들어주었던 훌륭한 옷들과 맛있는 음식이 생각이 났고, 또한 엄마나 우리가 엄마의 충고를 필요로 하는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것 같았습니다. 헬렌은 엄마조차 없지? 그 집에서는 아무도 뜰에 신선한 채소를 기르지 않고 맛있는 자두 버터도 만들지 않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란츠는 이윽고 체크무늬의 옷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빨간 드레스는 헬렌에게 주셔요. 헬렌이 그것을 가지는 것이 좋겠어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헬렌이 방에 들어오자 어머니는 빨간 새옷을 헬렌에게 주었습니다. 헬렌은 너무나 행복해하며 어머니를 꼭 껴안았습니다. 이후 프란츠는 다른 많은 옷들 중에 이 체크무늬의 옷이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글 마지막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 그 한 벌의 드레스를 통해 난 그렇게 멋진 일들을 많이 해주는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내게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를 상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엄마가 베풀어준 많은 것 중에서 최고로 멋진 일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우리를 훨씬 더 행복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몸소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다는 사실은 바로 이 엄마와 같이 자녀에게 가장 귀한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그 자녀의 삶에 간여하는 어머니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그저 교회에 나오면 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거리끼는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방금 예화로 든 프란츠가 남을 위해 좋은 새옷을 포기할 줄 아는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어떤 이들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구원을 경험한 반면, 어떤 이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반대하고 핍박하고, 함정을 파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 오셔서 우리의 삶에 간여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내 삶이 변화되기를 희망하며, 또한 변화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