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부활절설교] 어찌 부활이 없다 하는가?

코이네 2017. 4. 14. 23:24
>

어찌 부활이 없다 하는가?

본문 : 고린도 전서 15:12-19

2014.4.20. 부활주일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인생살이가 힘들고 괴로울 때는 특히 "죽어버리면 좋겠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릴텐데....."라는 말을 잘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금 사는게 중요하지 죽은 후까지 생각할 겨를이 있느냐?' 죽음 후에 대해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리고 막연히 죽음 후의 내세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은 어떨까요? 예전에는 죽은 후의 천국에 대한 소망이 간절했습니다. 그만큼 가난했고, 또 힘든 세월을 살아갔기에 이 고생이 끝난 후 영광의 천국에서 살 것이라는 소망으로 현실을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어떻게하든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은혜로 복을 누리고 살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지금 우리는 부활과 천국의 소망보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사로잡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부활과 천국을 잃어버리고 있다고나 할까요?

 

예수님께서 참 사랑하시던 사람이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바로 나사로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흘째 되던 날에 그 집에 문상을 갔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사흘동안은 그 육체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기에 나흘은 이미 소생의 가능성이 없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사흘째라도 예수님이 오시면 나사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그 시간을 지나 예수님이 오시자 그 누이 마르다는 실망한 빛으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그러자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줄 믿습니다.” 마르다의 이 말은 당신 유대인들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마지막 날 그 날이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부활할 때가 있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그 때 제 오라비가 다시 부활한들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그 때 마르다는 추상같은 주님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그리고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주여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에 죽어 썩어가고 있는 나사로를 살려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이 말을 들은 나사로는 죽었던 그 무덤, 완전히 그 영혼이 떠나 다시 살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 나사로를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 동네 사람들 앞에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들의 눈 앞에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시켜주신 것입니다. 마르다에게 질문하신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며 생명이다. 또 하나는 주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을 두 가지로 증명했습니다. 하나는 죽었던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다시 살아나 다시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다시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실을 믿느냐? 부활을 믿느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당시 헬라지역의 그 시대 사람들은 영혼불멸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사라지지만 그 영혼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리고 육체는 진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리 소중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악한 것이기에 영혼만이 소중하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아직 그런 생각을 벗어나지 못해 부활을 영혼불멸로 이해했습니다.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은 영혼이 죽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 고린도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며,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이 아니라, 우리의 죽었던 몸이 다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전통적인 사고로 이해한다면 우리 혼백이 영원히 구천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새 몸을 입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 새몸이 어떤 것인지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의 말씀을 좀 더 읽어 내려가면 우리가 죽었다가 어떤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게 된 몸은 하늘의 영광을 갖고 있으며, 썩지 않고, 욕되지 않고, 약하지 않고, 신령한 몸이며,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는데, 마지막 순간에 홀연히 그렇게 우리가 모두 변화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한 사두개인이 논쟁을 벌이며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우리의 몸이 어떻다구요? 천사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이루어질 우리의 현실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제가 존경하는 권사님 중 한 분의 이야깁니다. 심방을 가면 기도제목에 꼭 주님 절 기도하는 중에 데려가세요라는 말을 적어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 어느 날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집에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자기 방에서 기도하는 중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면 안죽을까 고민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멋있고 아름답게 품위 있게 죽을까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죽음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이 죽음을 극복하게 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말합니다. “사망에 네가 어디 있느냐?”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전 목사님이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사망, 이것은 무엇일까? 사망은 우리가 불멸의 옷을 입기 위해 기다리는 대합실이다. 사망이라고 하는 곳에서 우리의 육체는 주님을 맞아들이기에 합당한 몸이 된다.”

 

 

둘째, 부활을 믿는 사람은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두고 말씀합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자신을 모함하고, 배신하고, 욕하고, 조롱하고, 고문하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그 사람들을 그 고통 속에서 용서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그 나쁜 인간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심판하고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배신했던 그 사람들을 다시 찾아가 그들을 제자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용서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여 그들을 다시 사랑하고 그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부활하신 목적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고 죽으셨다면 부활하신 후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부활하여 하늘나라에 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보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천국이 천국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미움도 증오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를 용서하지 않고 천국에서 그 증오와 미움을 갖고 만난다면 그건 참 상상하기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용서하는 삶이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용서 정말 잘 안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생각하고 부활을 생각하면서 억지로라도 용서해봅시다. 일단 말이라도 용서한다고 해보십시오. 그래도 안되면 난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했다고 선포해보십시오. 그래도 미움이 가시지 않고 용서가 안되면 이렇게 기도하세요. “성령님 제발 제 마음을 다스려주십시오. 저의 미움을 다스려주십시오. 용서가 안되는 이 마음을 다스려주십시오.” 분명 주님께서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집시다. “그래도 난 당신이 천국갈 수 있길 바랍니다.”

 

셋째, 부활을 믿는 사람은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부활은 죽었던 것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영이며, 살리는 영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죽었던 세상, 죽어가는 세상을 살리는 것이 우리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 예전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은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산영,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살리는 영, 살아나게 하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부활은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죽음과 절망에서 살아나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부활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스텐포드 대학이 있습니다. 미국 최고의 대학 중 한 곳입니다. 이 명문 대학의 창설자 릴랜드 스탠포드씨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한 바 있고, 태평양 철도회사 사장과 상원의원도 역임한 자선 사업가였습니다. 대단한 부자였는 스탠포드씨에게 외동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을 잘 키우고 싶은 욕심에 이태리로 데려가 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그만 그곳에서 병에 걸려죽게 되었습니다. 겨우 아홉 살의 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 슬픔을 딛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지녔던 과거의 꿈과 희망은 다 먼지로 돌아갔다. 우리의 아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부부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든 자녀들을 우리의 자식처럼 여기며 그들을 위해 이 생을 바치겠다.” 그리고는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의 자리 탄식의 자리 절망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를 살리는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