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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장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고 또 큰 아들 이스마엘이 새로운 부족을 이루어가면서 점점 번성해져갔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강성해가자 그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패권자인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장관과 함께 찾아옵니다. 아브라함과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서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인 것에 비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바뀌어 이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게 된 것이죠. 그런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은 흔쾌히 손을 내밀어 잡아줍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자신의 우물을 빼앗은 것에 대해 책망합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은 몰랐던 일이라며 발뺌 하지만 잘못된 일을 바로잡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언약식을 거행합니다.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 언약의 샘이라 이름짓고,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오랜 시간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아브라함이 그렇게 강성해졌다고 해도 아비멜렉에게 그렇게 큰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비멜렉은 그의 군대장관과 함께 친히 아브라함을 찾아와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을 하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름이 아니라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만큼 아브라함은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를 해치거나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함께 계심을 본 것입니다. 그 하나님 때문에 아브라함을 잘 못 건드려서는 안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전 제가 알고 있는 성도 중에 깡패 출신이 있었습니다. 이 양반 교회에 나와서도 예전 자기 버릇을 고치지 않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말도 함부로 하고, 그래서 기피대상 1호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친 양반도 아주 연약한 연세 드신 권사님 앞에선 완전 말 잘듣는 강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저 권사님이 눈만 한 번 힘주면 그냥 깨갱~~ 고개 숙이고 "예" 그러면서 말을 듣는 겁니다. 제가 하도 신기해서 그 성도님을 붙잡고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권사님 앞에만 가면 그렇게 순한 어린양이 되냐? 그러자 그 분 하시는 말씀이
"권사님 정말 기도 많이 하십니다. 어떻게 된 건지 권사님 눈빛만 보면 오금이 다 저립니다. 권사님 말씀 안들었다가는 정말 하나님이 제게 벼락이라도 치실 것 같은 두려움이 들거든요. 저도 참 신기합니다. 그리고 이때까지 권사님 말 들어서 제가 손해본 것 없구요. 그저 감사할 뿐이죠."
이것이 바로 영적 권위입니다. 아브라함 개인은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함께 하시니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일이 아닙니다. 나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도록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영적권위가 있는 것이죠.
이러한 영적권위가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을 책망할 수 있으며, 세상의 잘 못된 것을 바로잡고,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21장,아브라함의 영적권위,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오다
창세기 21장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고 또 큰 아들 이스마엘이 새로운 부족을 이루어가면서 점점 번성해져갔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강성해가자 그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패권자인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장관과 함께 찾아옵니다. 아브라함과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서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인 것에 비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바뀌어 이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게 된 것이죠. 그런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은 흔쾌히 손을 내밀어 잡아줍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자신의 우물을 빼앗은 것에 대해 책망합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은 몰랐던 일이라며 발뺌 하지만 잘못된 일을 바로잡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언약식을 거행합니다.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 언약의 샘이라 이름짓고,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오랜 시간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아브라함이 그렇게 강성해졌다고 해도 아비멜렉에게 그렇게 큰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비멜렉은 그의 군대장관과 함께 친히 아브라함을 찾아와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을 하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름이 아니라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만큼 아브라함은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를 해치거나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함께 계심을 본 것입니다. 그 하나님 때문에 아브라함을 잘 못 건드려서는 안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손, 세상의 빛이 되라.
예전 제가 알고 있는 성도 중에 깡패 출신이 있었습니다. 이 양반 교회에 나와서도 예전 자기 버릇을 고치지 않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말도 함부로 하고, 그래서 기피대상 1호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친 양반도 아주 연약한 연세 드신 권사님 앞에선 완전 말 잘듣는 강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저 권사님이 눈만 한 번 힘주면 그냥 깨갱~~ 고개 숙이고 "예" 그러면서 말을 듣는 겁니다. 제가 하도 신기해서 그 성도님을 붙잡고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권사님 앞에만 가면 그렇게 순한 어린양이 되냐? 그러자 그 분 하시는 말씀이
"권사님 정말 기도 많이 하십니다. 어떻게 된 건지 권사님 눈빛만 보면 오금이 다 저립니다. 권사님 말씀 안들었다가는 정말 하나님이 제게 벼락이라도 치실 것 같은 두려움이 들거든요. 저도 참 신기합니다. 그리고 이때까지 권사님 말 들어서 제가 손해본 것 없구요. 그저 감사할 뿐이죠."
이것이 바로 영적 권위입니다. 아브라함 개인은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함께 하시니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일이 아닙니다. 나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도록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영적권위가 있는 것이죠.
이러한 영적권위가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을 책망할 수 있으며, 세상의 잘 못된 것을 바로잡고,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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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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