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아들을 내놓으라는 잔인한 하나님, 내주는 비정한 아브라함

코이네 2011. 7. 28. 12:59
>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창세기22장

성경에서 제일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바로 창세기 22장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을 지시하시고 또 아브라함 역시 상식으로 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거든요. 저도 신학을 하기 전까지 이 부분을 읽을 때는 가슴이 벌렁거렸습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분노가 밀어닥치더군요. 무슨 이야기냐구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100세가 되던 해 아들을 하나 주었습니다. 바로 이삭입니다. 얼마나 귀한 아들이겠습니까? 저도 첫 딸을 낳았을 때 얼마나 이쁜지 아침에 출근할 때 제 포켓에 넣어 갔으면 싶을 정도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소중한 아들, 그 아들이 어느 정도 장성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네 아들이지만 이삭은 내 것이니까 내 놔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나중 모세에게 율법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자녀를 제물로 삼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면 당시 몰렉이라는 종교를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사람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며, 그 제물이 다른 사람도 아닌 아브라함의 천금과 같은 아들 이삭이었던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아브라함에게 이런 잔인한 짓을 시킬 분이 아닌데, 우리의 상식을 깨고 그렇게 명령하신 것이죠.

그런데 더 이해 안되는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은 다음 날 새벽, 아들을 깨워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자며 그를 앞세워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갔습니다. 물론 그 아내 사라는 이런 일이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죠. 아마 알았으면 하나님과 사생결단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 지엄하다고 해도 이런 당치 않은 일을 지시할 때, 그것도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들을 달라는 것인데 어째 아브라함은 그렇게 순순히 하나님의 명령에 따랐을까? 전 아브라함이 정말 야비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에 자기 살려고 자기 아내를 팔아먹더니 이제는 자기 살려고 자기 자식까지 이렇게 내팽개치는구나. 정말 비정한 인간이다..

이윽고 하나님이 지시한 모리아산에 도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종들을 산 밑에서 기다리게 하고, 이삭을 앞세워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삭이 참 영특하였는가 봅니다. 산에 제사드리러 가는데 이상하게 제물이 없는 것이죠. 아버지 제물은 어딨습니까? 일순간 아브라함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아마 일반적인 아버지라면 그 말을 듣자 마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먼 산을 한 번 쳐다보고는 "가자" 그렇게 아들을 이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그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의 의중을 꿰뚫고 있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한 짓을 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이 준비한 쇼에 모르는 척 그렇게 참여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얼떨결에 그렇게 말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런 말로 단순히 아들 이삭을 안심시킨 것일까요?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제단을 만들고 장작을 올려 번제를 드릴 준비를 마칩니다. 갑자기 아들에게 달려들어 그 아들에게 칼을 들이댑니다. 전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아마 이삭에게 있어 이 순간의 기억은 그의 트라우마로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제지하고, 너의 진심을 알겠다는 말을 하시면서 정말 미리 준비한 숫양 한 마리로 대신 제물을 삼아 제사를 드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은 믿음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결단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_아들

살아난 이삭을 부둥켜 안고 있는 아브라함




어떻게 보면 쇼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정말 섬뜩한 현실로 보여집니다. 그러면서 드는 몇 가지 의문,

첫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왜 이런 일을 시켰을까?
둘째, 이삭은 이 트라우마를 어떻게 이겨내고 잘 성장했을까?
셋째, 눈에 보이는 사건 이면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진실이 있는 것일까?

이 사건이 있은 지 2천년이 지나 하나님은 이 비슷한 잔인한 일을 감행하십니다.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 자기 아들 예수를 제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겐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그 아들을 내놓으라 해놓고도 그 목숨을 받지 않으셨지만, 사람들이 우리 살기위해 당신 아들을 내놓으라 할 땐 그렇게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 바로 그렇게 죽기 위해서라고 하며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세상은 아니 인간사는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겠더군요. 예전에는 자기 살기 위해 아들을 대신 죽게하는 비정한 아버지로 보였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죽지 아들을 죽게 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있다면 그건 정말 비정한 아니 부모라고 할 수 없는 쓰레기겠죠.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길을 나섰을 때 이미 자기 목숨도 하나님께 드린 것이며, 또한 그보다 더 소중한 아들까지 함께 드린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마음만 받으셨습니다. 기이한 것은 우리의 목숨,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다른 이가 아닌 하나님께 드리면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더 훌륭하고 완벽하고 가치 있게..이것이 또 신앙의 신비로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이삭의 결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지혜로운 종의 기도
팔레스틴의 패자 아비멜렉의 굴욕
아브라함이 미녀는 괴로워라고 말한 사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