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 인생

도산 안창호 선생의 민족개조론은 기독교 신앙이 그 바탕

코이네 2015. 3. 2.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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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개조론, 흥사단 정신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한 도산 안창호 선생

 

1. 안창호 선생 (安昌浩/1878.11.9~1938.3.10)

 

독립운동가․사상가. 호 도산(島山). 평남 강서(江西) 출생.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도산공원에 세워진 도산 안창호의 기념비에는 안병욱 교수가 짓고 원곡 김기승 선생이 손수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도산 안창호는 일제의 침략에서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60평생을 구국 운동에 바친 위대한 애국자, 한국 민족을 인류의 모범이 되는 최고의 민족으로 완성하기 위하여 부단한 자아 혁신과 국민의 품격 향상을 힘쓴 민중 교화의 교육자, 무실역생과 인격 혁명과 대공주의의 사상으로 민족의지표와 역사의 진로를 밝힌 탁월한 사상가, 이상촌 건립과 사회개혁과 산업 진흥과 교육 건설로 백년 대계의 경륜을 보여 준 훌륭한 선각자, 진실과 사랑의 실천으로 위대한 인격을 갈고 닦아 국민의 사표가 된 뛰어난 지도자, 그는 겨레의 등불이요, 이 나라의 자랑이다."

 

 

도산안창호

 

2. 도산 안창호 선생의 생애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을 보며, 그는 일본과 청나라가 마음대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는 까닭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1895년 상경,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쾌재정(快哉亭)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李昇薰)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를 만들어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 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2년 그 곳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다.

 

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실패하고, 32년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재투옥되고, 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춘원 이광수가 쓴 "도산 안창호"에 보면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당한 안창호 선생을 종로 경찰서에서 검사가 "너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이냐"고 물으니,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서 하여 왔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3. 도산안창호 선생의 회심과 회개

 

그의 전기를 보면 그는 두번의 회심을 한다. 첫째는 1893년 15세때, 서당에서 만난 18세 팔대은이란 형을 만나 민족주의자가 된다. 그는 도산에게 자기만을 위해 살지말고 민족을 위해 교육자가 되든지 정치가가 되든지 한몸을 바치라고 권하였던 것이다. 두번째는, 선생이 상경해 구세학당에서 만난 송순명이란 전도자를 통해서이다.  그는 조국을 위해 신학문을 배우겠다는 안창호 선생에게 기독교적 민족주의를 가르치며, 편협한 민족주의로 살면 한국을 침략한 일본처럼 자신들만을 위해살겠다고 다른 나라를 괴롭히게 되는 것이며,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한 민족주의를 가져야 세상 모든 민족을 섬기기위해 우리민족의 자존과 번영을 구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도산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가 조금의 충돌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렇게 회개하며 울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죄인이올시다. 이 민족이 저희를 이렇게 위해 주는데 저는 민족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읍니다. 저는 죄인이올시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진은 선배를 원망하고 우리 민족의 책임을 자기 이외에게 돌리려고 하니 대관절 당신은 왜 못하고 남만 책망하려 합니까? '우리나라가 독립 못하는 것이 모두 나 때문이로구나'하고 가슴을 두드리며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놈이 죽일놈이라고 하며 자신들을 깨닫지 못합니까?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읍니까? 그것은 나 자신입니다"

 

4. 도산안창호 선생의 사상과 기독교 신앙

 

그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도산의 민족 사랑은 신본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회심한 기독인으로서 도산은 늘 하나님을 의식했고 또 역사적 부르심을 좆으려 했다. 그는 소년시절 고향을 떠나 서울의 예수교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25세부터 4년간 미국 유학생활을 했고 30대 초반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 시기에 도산은 기독교사상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았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도산의 사상은 서당교육과 기독교 교육의 바람직한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서당에서 신독(愼獨)과 근엄을, 기독교에선 정직과 근면, 절제 등을 배웠다. 이를 바탕으로 자아혁신을 통한 인격혁명을 강조했다. 개개인의 변화만이 민족 개조와 민족 독립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인격 혁명을 위해 그가 가장 강조한 개인 및 사회생활의 덕목은 '정직'이었다. 도산은 '거짓은 불공대천지원수'라고 할 정도로 거짓을 미워했다. '거짓 없음' 곧,'참됨'이야말로 한국인이 자기인격을 혁신하고 현대인으로 거듭나는 데 가장 근본적인 가치관이라고 보았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