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 인생

제중원의 첫 한국인의사 박서양 그가 독립군이 된 사연

코이네 2016. 3. 16.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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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첫 서양식 병원 '제중원' 의사가 된 박서양 그가 독립군이 된 사연

 

 

SBS-TV 월화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박용우)'은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의사가 된다. 그 뒤 조선 독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치료하는 군의(軍醫)의 삶을 택한다. 그런데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인 서양 의사 '황정'은 실제 인물일까? 그는 실존했던 백정(白丁) 출신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바뀜) 졸업자였으며 독립군에 투신해 군의가 된 박서양(朴瑞陽)이다.

 

박서양박서양

드라마처럼 어릴 적 이름이 '적은 근수가 나가는 개'라는 뜻의 '소근개'는 아니지만 천대받던 백정의 아들이었다. 백정은 기생·갖바치·무당·광대 등과 함께 당시 신분이 가장 낮은 천민 계급이었다. 백정은 상투를 틀 수도 없고 갓을 쓸 수도 없었다. 결혼해도 가마를 탈 수 없고 돈이 있어도 집에 기와조차 얹지 못했다.

 

1893년(고종 30년) 9월 에비슨이 장티푸스에 걸린 아버지 박성춘을 살렸다. 1894년 아버지 박성춘은 새뮤얼 무어(Samuel F Moore, 한국이름 모삼율(毛三栗, 1846∼1906))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다. 이후 모삼율 선교사는 백정과 그 자녀를 위한 선교,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95년에는 6명의 백정이 복음을 받아드렸다고 한다. 박성춘은 1895년에 정식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았고 1911년 12월에는 한국 최초로 백정 출신의 장로가 되었다. 1894년 박서양은 모삼율 선교사가 설립, 운영하던 곤당골 교회 부속 예수학당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로서 신학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모삼율의 배려로 그는 신학문을 배우고 새로운 세계의 존재를 접하게 되었다. 그 역시 어려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런 그가 1908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1회로 졸업했으며, 정부로부터 우리나라 최초 의사 면허인 '의술 개업 인허장'을 받은 7명 중의 하나였다. 어떻게 백정의 아들이 의학교에 입학하여 의사가 될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양반들이 병원의 지저분한 일을 할 수 없다고 입학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인·평민들이나 기독교인들도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서양의 아버지는 박성춘은 세브란스 교장 에비슨과 평소 친분이 있었다. 에비슨은 입학 전 박서양에게 먼저 허드렛일을 시켜 그의 됨됨이를 시험에 본 후 의사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입학시켰던 것이다.

 

 

 

 

1906년 제중원 의학교 재학 중 홍석후, 이승만, 김규식, 이교승 등과 함께 황성기독청년회에 나가 학생들의 교육을 맡았다. 특별히 그는 YMCA 학당의 부학감(부교감)을 맡아보기도 했다. 또한 제중원 의학교 재학 중 윤치호, 유길준 등의 중앙학교에 초빙되어 화학을 가르쳤으며 이후 낮에는 소학교 교사로 밤에는 의학부 학생으로 다녔다. 또한 제중원의 의사 조수로 활동하면서 의사의 수술을 보조하였다.

 

의사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박서양은 제중원에 입학한 지 7년만에 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3일)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해졌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난산(難産)의 고통을 겪고 있던 서울 합동의 김부인을 제중원 의사 허스터씨와 의학생 박서양씨가 소생시켰다"고 하였다.

 

1908년 6월 3일 세브란스의학교는 첫 졸업식에서는 7명을 졸업시켰다. 김필순, 신창희, 김희영, 홍종은, 홍석후, 주현측, 박서양 등 7명이다. 이 중 홍석후는 작곡가 홍난파의 형이었고, 김필순은 매제가 임정요인인 김규식이었다. 그런 이들이 백정출신의 박서양과 같이 의학공부를 하였고, 정부로부터 우리나라 최초 의사 면허인 '의술 개업 인허장'을 받았던 것이다.

 

 

 

 

졸업 직후 박서양은 기존에 출강하던 중앙학교 외에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학교 등에서 화학과 물리를 가르쳤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와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도 재직했다. 서울 승동교회에서 만든 승동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산소와 수소를 이용한 공개 화학실험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그의 신분을 문제 삼아 천시한 적이 있다. 그러자 "내 속에 있는 오백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라"고 했다. 그런 그가 한일병탄이 된 뒤인 1917년 돌연 만주로 떠나면서 그는 국내에선 잊혀졌다.

 

그는 연길에서 구세(救世)병원을 세우고 숭신(崇信)학교를 지었다. 한국인을 위한 진료와 교육 활동을 했다. 만주 지역의 독립무장투쟁단체인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군의(軍醫)로 임명돼 활동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그의 졸업 동기인 김필순이나 주현측, 신창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가 만주로 떠난 뒤 그의 행적은 단지 일제가 남긴 군(軍) 기밀서류에만 남아 있었다.

 

 

 

잊혀졌던 박서양의 독립운동 기록은 박형우 연세대 의대교수가 발굴했다. 이 기록으로 그는 숨진 지 68년이 지난 2008년에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의 뒷얘기는 칠레로 이민 간 그의 손자(74)가 2005년 귀국하면서 알려졌다.

 

박서양은 만주에서 돌아와 1940년 55세로 경기 고양에서 숨졌다고 한다. 3남3녀를 두어 큰아들은 세브란스 의대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다. 그의 동생 대양은 세브란스 의대를 나왔고 그의 여동생은 의사와 결혼했다.

 

신분 차별 철폐의 상징인 박서양은 백정 선교에 나섰던 승동교회의 무어 선교사와 에비슨, 그리고 아버지 박승춘의 이름과 함께 우리 백정 해방의 역사로 남아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