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 인생

독립신문을 통해 민족 각성을 일으킨 서재필의 신앙

코이네 2015. 3. 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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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을 통해 민족 각성을 일으킨 서재필의 신앙

 

 

1. 서재필 박사 (徐載弼/1866.11.20~1951)

 

독립운동가. 본관 달성(達城). 호 송재(松齋). 영어명 제이슨(P.Jason). 전남 보성(寶城) 출생. 그는 1951년 1월 5일 제2의 모국이 된 미국의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장례식 날 그 지역 신문에 실린 그에 대한 사설은 운명적으로 가진 두 조국에 대한 그의 충실한 일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메디아 시의 의사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 독립운동가 서재필 씨가 오늘 안장되었다. 한국 태생인 서씨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과 한국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한 불타는 열정을 가져왔고, 그 갈망을 행동에 옮긴 분이다. 불행히도 그의 작은 고국은 열강의 세력이 교차하던 곳이라 침략국들에 대한 그의 투쟁은 거의 끝이 없었고, 더욱이 승리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 시민이 되고 난 뒤에도 한국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서재필씨의 생애는 그의 고국과 귀화한 나라의 자유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정열로 점철되어왔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그는,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 요란했으나 이기적인 권력욕을 위해 행동했던 인물들과 달랐으며, 국민들을 억압하는 정부 제도에 반대했다. 서재필 씨는 역사상 진정한 위인들과 같이, 생존했을 때보다 서거시에 귀화한 이 지방 주민들에게 더욱 존경을 받을 것이다."

 

 

서재필박사 서재필과 독립신문

 

 

2. 서재필의 일생

 

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외숙인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879년(고종 16) 전강(殿講)에 장원하였다. 이 무렵부터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 83년 일본의 도쿄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 귀국 후 국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 조련국(操鍊局) 사관장이 되었다.

 

84년 12월 김옥균․홍영식(洪英植)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85년 미국으로 망명, 89년 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서재필은 스스로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는데,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이 두 가지 각성은 깊이 각인되었다.

 

그는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국의 민씨 일파가 몰락하자 96년 귀국 후 중추원(中樞院)고문에 임명되었다. 정부예산을 얻어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다.

 

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51년 1월 5일 88세의 일기로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田明雲)의사의 유해와 함께 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3. 서재필과 독립신문

 

1896년 내내 계몽강연 활동과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매주 배재학당에 출강해 젊은이들에게 자유 민주주의와 참정권, 인권 개념, 사회 계약론 등 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 때 이승만도 그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때 그는 비용 한푼 받지 않고 무료로 가르쳤다. 그 밖에 그는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조선 팔도를 순회강연하기도 했다. 조선을 순행할 때 그는 항상 미국인 경호원을 대동하고 돌아다녔다. 동시에 그는 배재학당에 나가 강사로 활동하며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 등의 학생들에게 세계사를 가르쳤고, 1896년 11월 학생들은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는데 1년 만에 회원이 약 200명으로 증가했다.[18] 협성회에도 이승만(李承晩), 김규식 등의 학생지사(志士)들이 모여들었고, 서재필은 학생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서재필은 조선인의 의식부터 개조되어야 진정한 독립국으로 발돋움할수 있고, 민권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당대에는 민주주의 체제의 등장이 어렵다고 내다봤다.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주의자들은 '독립신문'에서 “조선인의 타고난 체형은 동양 인종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자랑하거나 한때 ’상것’이라고 금기시했던 상민들의 석전(돌 싸움)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했다.

 

또한 그는 독립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서구식의 개선된 생활도 보급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1896년 11월 14일자의 독립신문 칼럼에서 그는 조선사람들의 매너없는 행동을 지적, '남의 집에 갈 때 파, 마늘을 먹고 가는 것은 아니며(실례이며), 남 앞으로 지나갈 때는 용서해 달라고 하고 지나가야 한다'고 했고, 1896년 10월 10일자에서는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만 먹지 말고 소고기와 브레드도 먹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외부 문명과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독립문영은문을 헐고 세운 독립문

 

 

4. 서재필의 신앙

 

서재필은 일본에 있던 미국 선교사들이 써준 몇 장의 소개장을 가지고 1885년 4월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행과 헤어져 홀로 남은 서재필은 이 무렵 "이 자연 세계에서 초탈하는 그 무엇인가에 도달해보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받고” 절망 속에서 교회를 찾아갔다. 취직을 하려고 여러 곳을 찾아다녔지만 영어가 서툴러 직장을 찾기가 어려웠다. 겨우 어떤 가구 상회에서 광고지 돌리는 일을 해서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되자. 그는 그 지역 기독청년회에서 운영하는 야간 학교에 등록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성경공부, 예배, 기도회 할 것 없이 집회마다 쫓아다녔다. 처음에는 신앙보다는 영어를 배울 욕심에서였지만, 곧 성경과 친해져 많은 성경 구절들도 암송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서재필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임창영(林昌榮)은 그가 기독교를 믿게 된 사실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서재필은 얼마 안가서 영어 이상의 것을 배웠으니, 그것은 그 자신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들 말대로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보다는, 하느님이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셨다면 그렇게 사셨을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가 사셨기 때문에 그를 신적인 존재로 생각했다. 또한 서재필이 예수를 존경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애매한 점과 모순들이 있는데도 그 자신의 체험을 통해, 예수가 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에 대한 그의 관념은 그의 인애사상, 그 자신은 물론 인간의 안녕과 복지를 도모하려는 그의 열망, 그리고 자기 힘만으로는 그 의무를 다 수행할 수 없다는 인식 등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언젠가 자신이 “이 자연 세계를 초탈하고 구 무엇인가에 도달해보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받고” 교회로 나간 것이 바로 이런 이유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 그리고 그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싸울 때, 자기 생명은 자기 이상의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살을 단념했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한 예수의 가르침을 발견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새 생명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의 신앙은 한말에 그가 조국에 다시 돌아와 1천여 명이 모인 정동교회의 집회에서 증거한대로 “구세주 은택을 감사”하는 신앙이었으며,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신앙이었다. 그는 여기서 “잠시 있는 육신을 도와주는 부모형제도 고맙다 하거늘 무궁한 영혼을 영생하는 길로 인도하시는 우리 구세주 은택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어찌 불쌍치 아니하랴”라고 역설하고 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