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본문 : 요한복음 1장 1절 - 14절
2023.6.4.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주일낮예배 설교
1.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교회는 잘 나오는 집사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다른 성도들에게 넌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냐며 시비를 겁니다. 이 과학시대에 성경말씀이 어떻게 믿겨지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자신이 보기에 기독교인들은 뇌가 비정상인 것 같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묻습니다. 그렇게 안 믿겨지면서 교회는 왜 또 그리 열심히 다니시나요? 그러자 하는 대답이 “목사님 제가 어떻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겠습니까? 세상에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제가 안 믿겨진다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지는 않지 않습니까? 솔직히 지금 하나님이 안 믿겨지지만 만일 계신다면 일단 교회라도 다니고 있어야 나중에 핑계라도 댈 것 아닙니까?”
2.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심심찮게 없앴다가 만들었다가 난리도 아닙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냐며 따집니다. 또 어떨 때는 이런 것도 모르고, 이런 것도 해결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믿어봐야 소용이 없다며 욕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합니다. 그래놓고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또 울고불며 제발 하나님이 있다면 도와달라고 외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도와줄 참 많은 신들을 만듭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속신은 칠성신입니다. 북두칠성을 섬기는 것이죠. 북두칠성을 통해 방향을 잡고, 또 별자리의 이동을 보며 농사도 짓기 때문에 북두칠성을 잘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게 불교에도 영향을 미쳐 절에 가면 칠성각이 있습니다.
또 아이를 점지해서 낳게 해주는 삼신할미가 있습니다. 집을 지켜주는 성주신, 주방을 관리하는 조왕신, 장독대를 지키는 철륭신이 있습니다. 집을 지켜주고 복을 주는 제석신, 우물을 지켜주는 우물신, 화장실을 지켜주는 정랑각시, 성주신의 아내로 부부 금술이 좋게 하는 지대부인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집안 곳곳에 없는 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신이 우리집구석구석을 지키고 있다고 믿으니 살아가는 게 든든한 것입니다.
일본에는 우리보다 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로마에도 엄청난 신들이 나옵니다.
모두 다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두려움 때문에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든 신들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리 많은 신들을 만들기도 하고, 또 신을 찾는 것일까요?
그건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신을 찾고 의지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태어나진 존재이고,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사람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한 신이 있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을 찾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찾는 것입니다. 자신의 근본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근본이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나약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는 살면서 늘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지켜줄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부모를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모의 보호 속에 있어야 안심하고 든든하게 살아갈 수 있듯이 하나님의 품에 있어야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죽습니다.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죽으면 끝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이고, 또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인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2. 빛으로 오신 예수님
나는 가끔 목사로 살아가고 있는 내가 참 신기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저 먼 이스라엘의 한 촌사람을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나는 무슨 맘으로 그분을 믿겠다고 나섰으며, 지금은 그분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드리며, 그분을 위해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내 개인뿐 아니라 우리 가문의 영광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여러분은 어떠세요?
요한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입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로는 “로고스”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세상의 근본, 진리”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하나님,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빼면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게 됩니다.
왜 사냐고 물으니 “그냥, 뭐 아직 살아있으니까”라고 말한다면 자신이 예수님 때문에 태어난 존재인 걸 몰랐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우리 모든 생명체는 다 생명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생명은 다 한정적입니다. 때가 되면 생명의 기운을 다하게 되어죽게 되거나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 교회 식당에 가스렌지가 있는데 이거 불을 켜려면 건전지를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건전지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건전지 다 됐다고 깜박깜박거립니다. 가스렌지가 고장나서 그런가 하고 알아봤더니 우리 가스렌지에는 자동온도조절센스가 있는데, 이거 때문에 건전지가 빨리 닳는다고 하네요. 그래서 보통 3개월 길면 6개월이 되면 건전지를 갈아줘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명도 건전기 같지 않습니까? 지금은 괜찮은데 시간이 되면 다 닳아서 꺼집니다. 10대나 20대를 보면 성장하고 있는 것이지만, 50대 이상을 보면 살아있지만 죽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땅에 오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누가 먼저 갈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이와 다릅니다. 제한된 생명이 아니라 영생하는 것입니다. 영생하는 생명을 가져야 온전한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이 없는데, 어떻게 영원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로 예수님은 “빛”입니다.
여러분 어두움이 무엇입니까? 어두움은 빛이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빛이 비치게 되면 자연히 어둠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흔히 이 세상을 어둠의 세계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둠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만연하고 있고, 그런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을 잃어버린 채 어둠 가운데 거하게 하면 길을 잃어버리게 되듯이, 빛을 잃어버린 인생은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3.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5절을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깨닫지 못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우크탈람바노”라고 합니다. 앞의 우크는 영어로 ‘not’ 아니다라는 뜻이고 ‘카탈람바노’라는 말은 ‘이해하다, 붙잡다, 따라잡다, 이기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번역할 때 번역본마다 조금씩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개역성경은 깨닫지 못하더라고 번역했습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어둠이 이기지 못하더라, 어둠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더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둘 다 가능한 번역이지만 저는 두 번째 ‘어둠이 이기지 못하더라’가 더욱 성경 전체적인 맥락에 맞게 해석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이 빛이 세상에 오자 세상의 어둠은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으며, 마침내 완벽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을 생각하면 그저 무섭다고만 느낍니다. 지금을 “말세”라고 하면서 망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다 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 덮힌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망합니까? 그 어둠에 빛이 비쳐서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종말이 무서운 날이기는 하지만 소망의 날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둠이 완전히 무너지고, 심판받는 날인 것과 동시에, 이 빛으로 인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기 때문입니다.
빛은 두 가지의 역할을 합니다. 하나는 이 빛이 비추게 되면 사물이 온전하게 보이게 됩니다. 어둠이 사라지면서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어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이 어둠을 이겨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 원인을 찾아보고 진단하고, 그리고 대안을 만듭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어둠 속에서 그것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물러갑니다.
빛의 두 번째 역할은 길을 찾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제대로 보이니까 방황하지 않고 제대로 길을 가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빛이 인생에 비칠 때 어둠에 방황하던 인생이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어둠에 대해 패배적인 생각을 갖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어둠에 대해 도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칠 때 저 어둠은 반드시 물러가게 된다는 믿음을 갖고 도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말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어둠의 역사가 빛의 역사로 인해 마침표를 찍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듯이,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비추는 것입니다.
이 빛이 한 개인에게 비치게 되면 그를 둘러싼 인생의 어둠이 물러가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종종 이런 상상기도를 합니다.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광채가 내 마음 방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이 빛은 나의 모든 삶의 구석구석에 미쳐서 나의 삶을 밝혀줍니다. 주님, 여기 나의 어둠이 있습니다. 여기를 당신의 빛으로 비춰주십시오. 마침내 주님의 광채가 우리를 온전하게 덮을 때 우리는 성령충만을 경험하게 되고, 주님의 빛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빛이 우리 가정에 비치게 되면 가정이 새로워집니다.
사회에 비치면 사회가 달라집니다.
역사에 비치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한 나라에 비치면 그 나라가 달라집니다.
온 세상에 비칠 때 온 세상이 달라집니다.
우리를 덮고 있던 어둠이 견디지 못하고 물러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빛이신 예수님의 승리에 동참하는 여러분 되길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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