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
본문 : 요한복음 1:12-18
2023.6.11.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박동진 목사 설교
1. 저는 처음 예수를 믿고 난 뒤 교회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죄인”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 이렇게 착하고 모범적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왜 자꾸 죄인이라고 하는가?
2.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한 분이 있었습니다.
예전 조선말에 독립협회 사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용단체인 황국협회가 독립협회를 탄압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고, 이 때문에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때 이들을 체포한 사람이 당시 현재의 경찰총장에 해당하는 경무사 김정근이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국민들의 분노를 싸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 같은 사태에 직면하자 정부는 이 모든 책임을 경무사 김정근에게 덮어씌워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리던 김정근은 감옥에서 하루하루를 분노를 곱씹으며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쩌다 성경을 읽게 되고, 선교사의 방문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할 일이 없으니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데, 성경에서 죄인이라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리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가?
그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날 때부터 맹인이었습니다. 이름이 앵사인데, 그 딸을 자신이 돌볼 수가 없어 아이를 버렸던 사실이 생각이 납니다. 자신이 참 몹쓸 짓을 했구나, 그러면서 자신이 지은 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이 나는데, 정말 죽겠더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어렸을 때 버려진 앵사가 너무나 불쌍한지 독방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괴성을 지르고, 벽을 치고, 나중에는 돌돌 구르며 가슴을 찢었습니다. 더 이상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 혼절을 했는데, 눈을 떠보니 자신이 예수님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고, 예수님이 자신을 바라보며 아주 측은한 눈으로 “그래 그래 내가 다 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가득 자리를 잡았던 분노와 복수의 칼날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더라는 것이죠.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서 잠을 잘 수 없었는데, 이제는 도리어 그들이 불쌍해지고 그들도 구원을 받아야 할텐데 걱정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태어난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처럼 산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처럼 죽은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처럼 그런 목적을 위해 죽은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처럼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한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사는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참 하나님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배척하고 외면하고 거부하며 심지어 핍박하고 죽이려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영접하며 믿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영접하며 믿었을까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오늘 읽는 본문의 말씀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설명합니다.
4.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에 예수님은 은혜가 충만한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첫째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분에 넘치는 귀한 것이란 뜻과
둘째 아름답다란 뜻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자비와 도움을 말하며, 이 모든 것을 다른 목적이나 사심 없이 단지 하나님의 진심 어린 사랑의 행위를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러기에 우리에게 우리가 받기엔 너무나 귀중한 것, 분에 넘치는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사람의 모습, 하나님이 임재한 자의 삶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17절에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고 하였습니다. 자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는 성육신 하여 우리 곁에 우리의 삶의 자리로 찾아와 우리의 삶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분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보여지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예수를 만날 때 하나님의 진면목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태어난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처럼 산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처럼 죽은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처럼 그런 목적을 위해 죽은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처럼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한 사람은 없었다.”
5. 은혜 위에 은혜란 무엇입니까?
1) 첫째는 이 은혜는 값없이 얻은 것입니다. 순전히 예수를 믿기 때문에 얻는 축복입니다.
2) 다음으로 은혜위에 은혜란 넘치는 은혜를 말합니다.
이것으로 넘치는 은혜입니다. 바다의 파도가 한번 밀려오면 그 뒤를 따라 계속적으로 밀려오는 것처럼 한번의 은혜로 끝나지 않고 은혜가 파도처럼 계속적으로 주어진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그의 아버지는 매달 생활비를 보내고 등록금을 보내주었습니다. 그 등록금을 보내줄 때마다 "아들아 잘 쓰거라 낭비치 말고 죄짓는데 쓰지 말고 꼭 필요한데만 아껴서 쓰거라" 이렇게 말하고는 "다음 달에 또 보내주마"이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다음달에 또 보내주마"하는 글에 용기를 얻게 되었고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박사까지 되었습니다. 은혜위에 은혜란 바로 "다음달에 또 보내주마'라고 하는 아버지의 약속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질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 은혜는 풍성하고 풍성하기 때문에 받는 자는 부족함이 없이 만족하게 되고 이 은혜를 받는 가정은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되고 이 은혜를 받는 교회가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는 기적의 교회요, 부흥의 교회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장에도, 여러분의 사업에도 하나님의 은혜 예수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가 절대로 필요한 줄 압니다. 여러분들의 지혜와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에 너무 의존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시고 기대하셔서 직장과 기업이 새로운 번영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발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혜 위에 은혜란 말은 적은 은혜에서 많은 은혜로 작은 은혜에서 큰 은혜로 점점 하나님의 은혜가 확장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욥기에 보게 되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욥 8:7). 이 말은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처음엔 보잘 것 없었지만 나중에는 크게 번창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란 말도 바로 그러한 말입니다.
처음에 교회에 나오실 때에 어떤 분들은 매우 서먹서먹해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증거합니다.
교회 생활만 그렇게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변합니다.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찾아왔습니다. 얼굴에 미소가 찾아왔고 말씨가 달라졌습니다. 절망의 말이 변하여 희망이요, 부정의 말이 변하여 긍정의 말이되었습니다.
그의 인격이 달라졌습니다. 근본적으로 새 사람 중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발걸음도 희망찬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그의 가정생활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직장생활이 달라졌습니다.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고 죽음이 생명으로 변하고 썩던 것이 새 생명을 얻고 어두움이 빛으로 바꾸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처음에 이 사람에게 나타난 은혜는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끌려서 또는 마지 못해서 교회에 겨우와서 앉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변하게 하시고 모든 생활에서 변화를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얕은데서 깊은데로 점점 더 깊은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정말 세상적이요, 육신적인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고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영적인 부요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남아있는 동안 예수와의 은밀한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아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집니다. 이런 삶을 가리켜서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말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 기독교를 이교 및 유대교와 대조한 2세기의 문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신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나라에 살지만 그냥 체류자들처럼 산다. 남들과 똑같이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분담하면서도 체류자들이 겪는 상황을 고스란히 참아낸다.
육체를 입고 살지만 육체를 따라 살지 않는다. 지상에서 세월을 보내지만 천상의 시민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규정된 법을 준수하는 동시에 법을 능가하는 생활을 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에게 박해를 받는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비난을 받는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산다.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케 만든다.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매사에 넉넉히 지낸다. 불명예를 당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칭송을 받는다. 욕을 먹어도 복을 빈다. 모욕을 당해도 정중한 태도로 갚는다. 선을 행하면서도 행악자로서 처벌을 받는다. 처벌을 받을 때도 기쁨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미워하는 이유를 대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는데, 바로 그 권세가 이런 삶의 변화를 일으키며, 우리로 하여금 은혜와 진리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와 진리 속에 승리하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 인생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이 은혜의 자리를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은혜가 충만한 주님을 만나면, 진리가 충만한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참 자유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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