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기독교

한국 교회의 첫 추도예배 어떻게 드렸나?

코이네 2022. 2. 15.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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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헤론 의사와 1894년 홀 의사의 추도식부터 선교사들의 추도회에 참석하고 관찰하던 한국 교인들은 

1896년부터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을 위한 토착적인 추도회를 드리기 시작했다. 

 

 

1896년 7월 원산에서 신자 오(吳)씨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작정하고 제사를 폐지했지만, 

제사 기일이 되자 선교사 스왈른과 간단한 추도식 후 

오씨는 마당에 불을 피우고 신주와 각종 제기, 부적들을 태웠다. 

그 후 그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가족과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족 예배를 드렸다.

문서에 나타난 형식을 갖춘 첫 추도회는 1897년 서울에서 시행되었다.

무관인 감리교인 이무영은 돌아가신 모친의 첫 기일 때 다음과 같은 기독교식 추도회를 드렸다.

현금에 궁내부 물품사장으로 있는 이무영 씨는 우리 교회 중 사랑하는 형제라.
음력 유월 이십구일은 그 대부인의 대기날인데 그 형제가 망극한 마음과 감구지회를 억제할 수 없는지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구세주를 믿은즉 다른 사람과 같이 음식을 벌려 놓고 제사 지낼 리는 없거니와
부모의 대소기를 당하여 효자의 마음이 어찌 그저 지나가리오.
이에 교중 여러 형제를 청좌하고 대청마루에 등촉을 밝히 달고
그 대부인의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 대부인이 생존하여 계실 때에 하나님을 믿음과 경계하던 말씀과 현숙하신 모양을 생각하며
일장을 통곡하고 교우들도 이무영 씨를 위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경경히 밤을 지낼새
그 모친에게 참 마음으로 제사를 드린지라.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이후에 다른 교우들도 부모의 대소기를 당하면 또한 이무영 씨와 같이 하기가 쉬울 듯하더라.
(“회즁신문”,『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7년 8월 11일)


제사와 비슷한 점은 의례 시간을 밤으로 정한 것, 등촉, 죽은 영혼을 위한 기도, 통곡 등이었다. 제사와 다른 점은 선교사와 교인 초청, 제사상(술과 음식) 차리지 않음, 예배로서 기도, 찬송, 말씀, 회고, 기도로 진행한 점이었다. 곧 제사의 문화적 윤리적 전통은 그대로 유지하되 우상숭배적 요소는 배제하고 대신 기독교적 요소로 대체했다. 비판적 문화 적응 사례인 이 한국적 추도회는 점차 다른 교인들에게 보급되어 기독교 의례로 자리잡았다.

1903년 5월 제물포의 손우정은 모친상 일주기에 음식을 마련하고 수십 명의 교우를 밤에 초청하고, 찬송, 기도, 성경 봉독, 모친 노다 부인의 신앙과 행적 회고의 순서로 추도회를 드렸다. 예배 후 그들은 모친이 좋아하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러한 변형된 추도회에 대해 권사 장원근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는 별세한 부모를 위하여 제사를 차리고 밤이 다할 때까지 목이 쉬도록 우는 것보다 더욱 부모에게 효도가 될지니, 노다 부인께서 이같이 자제를 교훈하심과 또한 그 자제의 이 같은 효심을 치하하노라.”

이후 한국교회는 계속 추도회를 가졌으나, 추도회에서 문제가 된 것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였다. 선교사들은 1904년 선교대회에서 일부 교인들이 추도회 때 조상을 위해 기도하는문제를 놓고 토론했다. 비록 일부 선교사들이 이 문제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으나, 북미 복음주의 신학은 사후에는 심판이 있고 한번 상벌이 내려지면 다시 회개할 기회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자를 위한 기도나 연옥설은 전도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므로,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에 서 있던 장로교나 감리교는 이를 강력히 금지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추도회 때 죽은 자의 구원을 위한 기도는 폐했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시고” 구절도 생략했다.

제사 대신 드린 추도회는

① 조상들의 매년 기일 인정하고,

② 신주 대신 영정을 모시게 했으며,

③ 기일 제사와 묘지 방문 제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족보 유지,

④ 제사 시간과 장소, 일부 형식은 그대로 두었다.

 

다른 점은

⑤ 목회자와 교우들을 초청하여 찬송, 기도, 성경 읽기 등의 간단한 예배와 음식을 나누며 돌아가신 분을 추억하는 형식이 추가되었다.

⑥ 또한 조상 기념의 방법으로 유지 받들기와 자선사업 기부를 강조했다.

이는 조상에 대한 의존을 그리스도 안에서 조상과의 영적 교제로 변형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일부 교인들은 여전히 추도회 때 믿지 않고 죽은 조상과 부모를 위한 기도를 계속했다.

 

*위 내용은 옥성득(UCLA) 교수의 글 중 첫 추도예배에 대한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by 레몬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