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 칼럼

일왕이 위안부 피해자에게 해야 할 그 말 한 마디

코이네 2024. 1. 2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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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한 마디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있었다. 그 집의 가장 큰 어른은 구순이 넘으신 할머니였는데 치매를 앓고 있었다. 종종 가족들 몰래 집을 나와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다 교회를 찾아오셨고,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댁에 모셔다 드렸다. 할머니 얼굴이 얼마나 해맑은지 천사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또 그렇게 할머니를 댁으로 모셔다 드리고 돌아서는데, 그 할머니의 며느리가 고래고래 악을 쓰며 욕을 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며느리가 우리교회 성도였기에 순간 많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발길을 멈추고 멍하니 있는데, 동네 사람들의 또 그런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 일이 마음에 많이 걸려 그 집으로 심방(목회자가 성도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가서는 조심스레 그 일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그 며느리가 부끄럽고 죄송하다며 자초지정을 설명해주었다.

 

지금은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세상모르는 표정으로 마치 천사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예전에는 시집살이를 엄청나게 시켰다고 한다. 시집살이를 얼마나 모질게 당했는지 구구절절 말하는데 그 목소리에 한이 서려있었다. 시어머니에게 맞아서 생긴 상처도 보여준다. 그 당시에는 시어른들이 너무 무서워 대꾸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하기만 했는데, 이제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는 이렇게 치매에 걸려 자신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고 보니 복수심이 일더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잘 참아왔는데 이번처럼 말없이 집을 나가 가족들 애를 태우다가 목사님 손에 이끌려 세상없이 착한 얼굴을 하고 해맑은 미소를 띠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속이 뒤집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결코 이래서는 안 되는 줄 아는데, 자신도 모르게 바락바락 악을 쓰게 되고, 온갖 쌍욕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그런 자신이 얼마나 미운지 미칠 것 같다며 기도해달라고 부탁한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잘 다스려주시고, 옛날에 입은 그 상처, 화병이 되어 버린 과거의 기억들이 모두 순화되고, 또 잊어버리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몇 달 뒤 할머니가 위독하시니 와서 예배를 드려달라고 연락이 왔다. 급하게 예배 준비를 해서 달려갔더니, 할머니는 이미 숨을 거두셨고, 그 집은 울음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며느리가 할머니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통곡하고 있었다. “어머니 아니예요, 제가 미안해요, 제가 죽일 년이어요. 용서해주세요.”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며느리가 저리 통곡하고 있는 것일까?

 

할머니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 잠시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왔다. 그 때 며느리를 불러서는 그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안하다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그렇게 며느리를 바라보다가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순간 한으로 응어리진 며느리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버렸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는데, 진심어린 말 한마디, 미안하다는 그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쌓아왔던 원한과 분노를 한 순간에 녹여버린 것이다.

 

인권운동가이자 일본군 위안부 성폭력 피해자인 고 김복동 할머니께서 일본 너무하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별세하셨다. 원한이 풀리지 못한 탓이다.

 

최근 문희상 국회의장이 블룸버그통신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왕이 (사과) 했으면 좋겠어요. 그분은 전범(전쟁범죄인)의 주범의 아드님 아니세요? (위안부 피해) 할머니 한 번 손잡고 '정말 잘 못했어요' 그 말 한마디에 탁 풀어지는 거예요."

 

문의장의 말에 일본은 발칵 뒤집혔고 비난의 소리를 높였다. 일본의 이런 태도는 참 안타깝다. 문의장 말대로 일왕이 위안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죄송합니다. 정말 잘 못했습니다한 마디면 될 일을 왜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하지 못하고, 계속 원한과 미움만 쌓아두려 하는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 원한을 풀지 못한 채 한 분 한 분 이 땅을 떠나고 있다. 아직 생존해 계신 분들이 있을 때가 일본이 용서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길 바란다. (*)

 

* 이 글은 2019년 3월에 양산시민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by 박동진 목사(소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