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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예화, 한국 호스피스 사역의 아버지 원주희 목사

코이네 2013. 4. 2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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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희 목사, 샘물호스티스 사역으로 한국 호스피스 사역의 아버지, 약사였던 그가 목사가 된 사연,



한국에 호스피스 사역에 아버지라고 불리울 수 있는 원주희 목사님, 지금까지 약 20년 동안 5600명이 넘는 말기 암환자들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저들을 천국 가는 길로 인도해주신 귀한 목사님. 때로는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들 가족들마저 등을 돌린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였다. 

그는 목사지만 동시에 약사로 또 장의사로 버스기사로 그들을 섬겼다. 한국호스피스의 아버지 원주희 목사,
3남2녀의 넷째로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71년 중앙대 약대에 진학하였고, 학군사관(ROTC) 장교로 군에 입대하였다. 군 생활 중 부대 대항 스케이트 대회 연습을 하다 넘어져 고관절 인대를 다쳤고, 일반 진통제로는 통증이 줄지 않아 모르핀까지 썼지만 헛수고였다. 약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던 그에게 문득 죽음의 공포가 찾아왔다. ‘불시에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해소키 위해 그는 ‘진중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다. 병상에서 고통을 참아내던 어느 날, 그에게 군종병과 기독교인 병사들이 찾아왔다. 이들이 손을 잡고 찬양과 기도를 해 주는데 놀랍게도 통증이 사라졌다.

‘의학의 한계를 신앙이 뛰어넘을 수도 있구나. 이게 하나님의 능력인가!’

통증이 줄면서 그의 마음엔 평안이 깃들기 시작했다. 약에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니 점차 신의 존재가 믿어졌다. 전역 후 그는 영등포시장 인근에서 약국을 개업하였다. 퇴근할 때면 돈세는 것이 귀찮을 정도로 수입이 많았던 그에게 폐결핵이 찾아왔다.

“성적이 좋아 대기업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졸업했고, 임관할 때 국무총리상을 받을 정도로 성실하게 살았어요. 그런 제가 왜 자꾸 사고가 나고 병에 걸리는지 이해할 수 없더군요. 시련이 잦아지니 하나님께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이 있다면 내게 이럴 순 없다’는 마음으로 매일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순전히 ‘신은 허구다’라는 제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원 목사의 뜻과는 달리 성경말씀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죽음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성경말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 죄와 죽음을 해결하러 오셨고, 이 때문에 제가 값없이 영생을 얻게 됐다는 성경말씀을 읽었을 때,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죽음 이후 영원한 삶을 주셨다는데 더 이상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죽음의 공포에서 해결되니 그간 돈 버는 데 목숨 걸었던 일이 부질없게 느껴졌고, 우울했던 제 삶도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당신도 죽음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예수께서 죽음의 고통을 해결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원 목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약국에 오는 손님들마다 복음을 전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약국 밖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승합차 한 대를 샀다. 온 가족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전도하기 위해서였다.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 원 목사는 다른 이에게도 자신과 같은 감격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들에겐 특히 그랬다. 이들에게도 자신이 체험한 자유와 행복을 느낄 기회를 주고 싶었다. 
 

원주희 목사

원주희 목사와 그의 저서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찾던 중 그는 한 외국 잡지에서 ‘호스피스(hospice)’를 알게 된다. 잡지는 ‘호스피스란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평안한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활동으로 영미권에서 확산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꿈꾸던 것과 부합하는 사역을 찾은 원 목사는 뛸 듯이 기뻤다.

약국을 개업한 지 4년 만인 83년, 그는 호스피스를 공부하기 위해 약사 생활을 정리하고 호주로 유학을 떠날 것을 결심했지만 가족의 만류로 포기하고, 86년 합동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사회복지 차원을 넘어 복음으로 희망을 전하는 호스피스를 세우려면 신학적으로 견고한 바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장생활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지 1년 뒤인 93년에 ‘샘물호스피스병원’을 경기도 용인시 가창리에 개원했다. 호스피스 사역의 뜻을 품은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샘물호스피스병원에서 환우들이 지내는 기간은 평균 한 달 정도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를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이상을 넘기는 경우가 잘 없다. 두 달 정도 이곳에 있으면 일반 병원으로 치면 장기 입원환자에 해당될 정도다.

그럼에도 이곳에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만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상당수 환자들이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배시간이나 식사 도중 시신이 지나가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 안타까워하는 가족과 의료진, 봉사자들에게 오히려 “우리 천국에서 봅시다.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까”란 말을 남기는 환자들이 적지 않다. 복음적 죽음관을 받아들여 두려움을 극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복음 안에서 준비된 죽음을 강조하는 원 목사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유언장에도 썼지만 저는 ‘절망적인 죽음 앞에 있는 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복하게 해 주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합니다. 그때까지 부르시면 언제든 간다는 자세로 최선을 다해 남은 시간을 살 것입니다.”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인생이 무엇인가?' 죽음과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때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바로 히브리서 2장 15절-18절의 말씀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붙잡고 이전에 자기처럼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주의 사랑으로 섬기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마음에 평안함을 주고, 그들을 위로해주고, 그래서 죽음이 다가와도 찬양하며 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

(이글은 국민일보 2013.3.15자 기사내용을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by 소토교회 코이네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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