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인류최초 형제의 난,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

코이네 2011. 1. 18.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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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장,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 최초의 살인



창세기 4장

창세기4장에 이르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첫째 아들이 가인입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의 말뜻은 "얻다"입니다. 내가 낳았다가 아니라 하나님께 얻었다는 것인데, 이 이름에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상당히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벨입니다. 성경에는 이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 둘은 형제이지만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형은 농부로서, 동생은 목축을 하죠. 그리고 이들이 수확을 거두게 되자 그것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제물은 당연히 농부인 가인은 곡물로, 목축업을 하는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물은 받지를 않으신 것입니다. 상상을 해보면 큰 돌 제단을 만들고 거기에 자신들이 준비한 제물을 올려두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을 때, 아벨의 제물에는 하늘에서 불이 임하여 그것을 태웠지만, 가인의 제단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나름 추측을 해봅니다. 왜냐면 구약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준비한 제물에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켜 그 제단에 불을 피워 제물을 불사른 장면들이 꽤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가인은 분노합니다. 성경에는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그 이유를 자세히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는 대목에서 가인이 드린 제사가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는 불경한 것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배하는 자는 신실한 마음과 진실된 태도로 드려야 한다고 하셨는데, 가인에게는 제사의 형식은 갖췄지만 그 내용은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전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의 제사는 피의 제사이기에 그 제물은 생명있는 제물이어야 하고, 가인은 이를 어긴 것이라고 설명을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후 제사예법이 구체적으로 갖추어졌을 때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도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들이 드린 제사는 속죄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감사의 성격이 더 큰 것이었다고 볼 때 그 제물이 양과 같은 동물로 해야한다는 것은 수긍하기 힘든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말에도 방귀 낀 놈이 성낸다고 가인은 분노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모든 화살을 아벨에게로 돌리고는 아벨만 없으면 자신이 이런 굴욕을 다시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만 없으면 하나님은 나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유아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는 아주 잔인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동생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런 가인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을 불러 그의 잘못된 행동을 타이릅니다. 그 말씀 속에 우리 인간들이 새겨 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걱정하신 것처럼 죄에 지배당하게 되고, 죄에게 조종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광야에 동생을 몰래 불러내어서 살해합니다. 그리고는 그 시체를 당에 묻고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 척하죠. 하지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가인은 그 아버지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받은 것처럼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살인자 가인에게 땅의 소산을 얻지 못하고,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선고를 들은 가인은 또 하나의 염려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떠돌이가 되면 자신의 목숨 또한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죠.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목숨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인의 청을 들어주어 이마에 특별한 표식을 해주고는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죠.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죄를 범한 가인에게 내린 하나님의 형벌은 너무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생을 살해했고, 살인자에게 내리는 벌은 바로 사형인데 하나님은 단지 세상에 떠돌이로 살아가게 하고, 또 그런 가인의 목숨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이죠.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건 죽음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남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사람, 가인처럼 형제의 목숨도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죽일 수 있기에 자신도 충분히 그런 일을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것이죠. 아마 죽을 때까지 하루도 편하게 살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전직 마약왕으로 수배당하던 사람이 30년인가 지나서 잡혔습니다. 그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이 맞습니다. 저를 잡았군요. 저는 이때까지 제 뒤를 항상 쳐다보며 불안해했었고 언제 이날이 올지 궁금했었습니다.” 아마 살인자 가인의 인생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건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 민족의 생존을 무시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무력으로 침공하고, 또 잔악한 전쟁을 일으킨 모든 나라들 역시 자신들도 그런 일을 당할 것이라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또 그런 나라들, 아무리 대 제국을 이루어도 어느 날 역사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 남 때문에 우리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죄를 다스리지 못해서 불행해 지는 것이죠. 남 때문에 나의 평화가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 때문에 그 평화가 힘든 것입니다. 나를 위협하는 적이 없으면 평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적, 평화를 사랑하지 못하는 그 태도가 전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