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사도행전8장, 마술사 시몬은 왜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는가?

코이네 2014. 4. 26.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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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장, 빌립의 전도와 세례 받은 마술사 시몬, 그리고 사도들이 안수한 후 내린 성령세례

 

사도행전 8장 4 절로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먼저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6절)"-----보고, 듣고, 좇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그가 행하는 이적을 보고는 깜짝 놀란 많은 사람들이 빌립을 좇았다고 합니다. 이적을 보았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여기 서 우리는 사마리아사람들이 빌립의 이적에 매료되어 모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시몬을 보십시오. 시몬은 마술사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술은 가짜입니다. 눈속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술이 가짜라 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속 아서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시몬을 따라다니지만 자기는 알거든요. 가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몬이 빌립을 보니 이것은 진짜거든요. 자기가 하는 마술은 굉장한 것 같지만 가짜인데 빌립의 이 적은 진짜란 말입니다. 그러니 시몬이 빌립을 따를 수밖에요.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13절)"하는 본문말씀대로 시몬은 빌립의 이적을 보고는 야, 굉장하구나, 하고 깜짝 놀라 빌립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시몬이 빌립을 따르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왜 따르는 것입니까? 빌립의 표적은 어디까지나 진짜 마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는 것은 가짜 마술인데 빌립이 하는 것은 진짜 마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빌립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보고 '아이쿠, 정말 대선배가 오셨구나! 나 같은 것은 어림도 없구나!'하고는 결국 빌립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후 배 마술사된 입장에서 선배 마술사를 따른 것이지요. 빌립에 비하면 자기는 약과요 아무 것도 아니다, 해서 진짜 이적을 행하는 빌립 앞에 굴복하고 그를 열심히 따랐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봅시다. 시몬이 빌립을 왜 따랐을 것 같습니까? 배우려 고 따른 것이지요. 자기의 하는 것은 시원찮은 마술인데 저쪽은 진짜 마술이거든요. 저것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으니 열심히 따를 밖에요. 이제 이 열심은 누구도 당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본격적으로 배워볼 생각으로 열심히 따랐다는 말씀입니다.
 
빌립을 열심히 좇아서 이적을 행하는 그 방법을 알아낼 요량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직접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따랐습니다. 굉장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겠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받으라면 당장에 받지요. 당장 마술을 배워야 할 판인데, 저 이적을 힘입어야 하는데, 지금 저 굉장한 이적을 보았는데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당장에 세례를 받지요. 그뿐입니까? 뭐든지 하지요.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금식하라면 금식하고, 철야하라면 철야하고, 세례 받으라면 세례 받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래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은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몬을 따를 때에 열심히 따랐습니다.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는 말씀대로 시몬을 따라다닐 때에도 하나 님의 사람으로 알고 따랐습니다. 가짜를 보고 말이지요.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렇게 어수룩합니다. 마술사 시몬을 좇아갈 때에도 하나님 의 능력인 줄 알고, 위대한 분이라고 찬양하면서 따랐다는 말입니다. 마술사 따르던 그 마음으로 빌립을 좇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마리아사람들이 외양상 예수를 믿게 되었고, 세례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학습세례 같은 것을 거친 뒤에 세례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당장에 세례 받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니까 빌립이 세례를 준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보니 이 사람들 의 믿음이 참 믿음이 아닙니다. 성령을 모르고 있습니다. 얼핏보기에는 누구보다도 열심인 것 같고, 뜨거운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시몬의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시몬적 믿음'입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표시요, 교회공동체의 일원이 된다고 하는 하나의 표지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이런 의미의 예식을 행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는 참 믿음이 있어서 세례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선 세례부터 받고 은혜는 뒤에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일 년에 한 천 명 정도 세례를 줍니다. 세례를 주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보면 세례 받는 그 순간에 큰 은혜를 받는 분이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하고 머리에 성수를 부을 때 얼굴에 흘러내리는 성수와 함께 눈물도 흐릅니다. 흐느껴 웁니다. 이렇듯 큰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세례 받을 때에 영적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큰 은혜를 받는 분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세례를 받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한번 받아보자 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교인 명부에도 오릅니다. 이렇듯 세례 받을 때에 뭐가 뭔지 모르고 정신없이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단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식이라는 것이 조용합니다. 화끈하지가 못합니다. 마치 결혼식과 같습니다. 정말 너 없으면 죽는다 할 정도의 화끈한 심사로 결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가 뭔지 잘 모르고 하는 사람도 많아요. 우선 결혼식 해놓고 사는 것입니다. 살다가 사랑하는 것이지요. 유행가 가사처럼 정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십 년을 살고 보니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것이 정말로 사랑한 것입니까? 그럭저럭 산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같이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면서 점점 사랑이 깊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십 년 살다 보니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좀 늦게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사랑하고 결혼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세례식이라는 것이 결혼식과 다름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마리아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믿음의 간증은 없습니다. 그런 체험은 아직 없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바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복음서적으로 성령 받는다는 말과 사도행전적으로 성령 받는다는 말은 개념적으로 틀립니다. 성경론적으로 볼 때에 엄격한 구별이 있습니다. 먼저 복음서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는 베드로의 고백도 바로 성령 받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신앙고백 했으니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세례 받은 것도 그렇습니다. 안 받을 수도 있는데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받았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성령의 역사에는 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방언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언이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적 방언이란 무엇입니까? 못 알아듣는 방언은 고린도서적 방언입니다. 사도행전적 방언은 못 알아듣는 사람들을 알아듣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통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15개국이 넘는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멀뚱멀뚱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하다보니 방언으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사실대로 하자면 베드로가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방언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가 알아듣는 것입니다. 통역 없이 전부가 알아들어요. 바로 그런 순간을 방언이라고, 성령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말을 사용하는 지는 묻지 맙시다.
 
우리가 듣는 말씀이 있어요. 그런데 좀처럼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시면 그 말씀이 믿어지고 납득하게 됩니다. 그 말씀에 내 생명을 위탁할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엄청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바로 그 때가 방언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이제 전적으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와서 부딪쳐요. 그래서 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바의 성령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보십시오. 사마리아사람들이 시몬과 함께 빌립의 표적을 보고 놀라서 건성으로 그를 따라다니고 빌립 앞에 나와서 세례도 받았습니다마는 진정으로 예수 믿은 것은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자 비로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말 씀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은 '성령 받았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적 의미에서 성령 받았다는 말을 이해하면 오늘의 본문은 쉽게 납득할 수 있게 됩니다.
 
유아세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유아세례를 받을 때에 무엇을 알고 받았습니까? 모르고 받았어요. 그 다음에 우리가 치르는 입교문답이 있습니다. 입교문답 할 때에 다시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견진례와 같습니다. 우리 신교의 견진례인 셈입니다. 자기신앙으로 고백하고 이제부터 세례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만 받은 사람은 아직 세례교인이 아닙니다. 입교문답을 하면서 세례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무리 세례를 받고, 성경을 배우고, 오랫동안 예수를 믿고 했다 하더라도 성령 못 받은 사람 많습니다. 중생 못한 사람 많아요. 오늘의 본문 역시 이제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중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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