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창40:1] 인생은 요지경

코이네 2017. 5. 21.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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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요지경

본문 : 창세기 40:1-23

2017.5.14.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자식을 낳아 키우느라 고생하는 이 땅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응원하며, 축복합니다. 수고 많으셨고, 또 지금도 수고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늘의 상이 클 것입니다.

 

제가 세상을 살면서 두 가지 말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갑니다. 첫째는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상은 요지경이다는 것입니다.

 

새옹지마라는 말은 중국 전한 시대의 회남자라는 책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북쪽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노인이 기르던 말이 도망가자 사람들은 "말이 도망가서 어쩌나"라고 위로 했지만 이 노인은 "이게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라며 낙심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도망갔던 말이 많은 야생마들을 이끌고 노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부자가 되셨구려"라고 축하했지만 이 노인은 "이게 화가 될지 어찌 알겠소"라며 기뻐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의 아들이 그 말들 중에서 좋은 말 하나를 골라 타고 다니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크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아들이 다쳐서 저 지경이 되었으니 어쩌나"라고 위로했지만 노인은 "이게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 라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얼마 후,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많은 남자들이 징집되어 전사했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못쓰게 된 탓에 징집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노인이 왜 그리 모든 일에 덤덤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새옹지마를 요즘말로 하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요지경은 제가 어렸을 때 운동회 때 볼 수 있는 장난감입니다. 확대경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재밌는 이야기가 그림으로 지나갑니다. 그 내용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쏭달쏭한 거죠. 그래서 세상은 요지경..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쏭달쏭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옹지마나 요지경이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인생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또 인생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좀 도를 통한 사람들의 말이라는 것이죠.

 

마차

 

 

오늘 우리는 감옥에 있는 요셉을 봅니다. 잘 알다시피 그는 야곱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왕자처럼 잘 지내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뻔했습니다. 구사일생 목숨은 건졌지만 사느니보다 못한 노예 신세가 되어 이집트의 군대장관에게 팔려갑니다. 그래도 거기서 열심히 일해 주인의 인정을 받아 그 집을 관장하는 집사가 되었지만 그 여주인의 모함으로 감옥에 가게 됩니다. 왕자에서 죽을 고비 넘기고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었다가 이제 좀 살만하니 감옥의 죄수가 되었습니다. 뭐 이런 인생이 다 있습니까? 그런데 거기서도 그는 믿을만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을 잘 섬깁니다. 그래서 간수의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감옥에 당시 이집트의 최고위 실권자 두 사람이 옥에 갇히는데 그 두 사람을 특별히 섬기는 일을 맡습니다. 한 사람은 술 맡은 관원장이고 한 사람은 떡 맡은 관원장입니다. 현대식으로 바꿔 말한다면 한 사람은 왕 곁에서 술을 따라주며 왕의 친구도 되어주고 개인상담도 하는 최측근 중의 측근 즉 대통령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왕의 음식을 담당하는 주방장인데, 이 주방장은 음식 솜씨도 대단해야 할 뿐 아니라 왕이 자기의 음식을 맡길 수 있을 만큼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즉 이 두 사람은 왕의 최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인데 어떻게 둘 다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아마 두 사람 다 역모에 연루되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여러분 이 두 사람 다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았겠습니까? 아마 간 쓸게 다 내주고 그 자리에 올랐을 것입니다. 이들은 살면서 그저 위로 오르기 위해 살았지 이렇게 한 순간 나락에 떨어질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럴 수 있는 게 사람이고 인생입니다.

 

감옥에 갇힌 이 두 사람, 하루는 둘 다 꿈을 꿉니다. 먼저 술 맡은 관원이 자신이 꾼 꿈을 요셉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그의 꿈을 들은 요셉은 사흘 후에 당신이 사면되어 복직하게 될 것이라고 꿈을 풀어줍니다. 그러자 떡 맡은 관원장도 자신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사흘 후 당신이 사형 당할 것이라 해몽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요셉이 풀이한 대로 되었습니다.

 

술맡은 관원장 요셉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그는 옥을 나서면서 요셉에게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철썩같이 약속합니다. 그런데 나가자마자 그는 요셉을 잊어버립니다. 세상살이가 그래요. 옥을 나설 때 이 관원장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가서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자기도 모른다는 것과 남의 인생을 챙겨줄 수 있을 만큼 한가하거나 능력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 주제를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주제넘은 말을 자주 잘 합니다. 나만 믿어라, 내가 해줄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20년 목회를 하면서 여러 교회를 옮기면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마다 꼭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우리 교회에서 목회 잘 하실 수 있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전 그런 사람 못 믿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교회를 맡아 목회하는 게 쉬워보일지 몰라도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목회를 전문적으로 배운 목사님들이 수 십년을 목회해도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교회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수로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까? 택도 없는 소립니다. 얼마나 교회를 우습게 알았으면 이런 소리를 하는지..

 

요셉은 술맡은 관원장이 감옥을 나갈 때만 해도 곧 이 감옥을 나갈 것이라는 부푼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관원장은 요셉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요셉은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속절없이 감옥 안에서 애만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의 눈에 이 요셉의 모습이 어떻게 보입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뭔가 좀 달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믿는 보람이 있죠. 믿는 자도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믿지 않는 자도 떨어지고..그런데 도리어 믿지 않는 자는 감옥을 나서고, 믿는 자는 지금도 감옥에 그대로 갇혀있고.. 도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이런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억울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해 기도하며 거룩하게 살았는데, 멋대로 산 사람만도 못 할 때는 없었습니까? 십일조도 늘 먼저 바치고, 성경도 자기 나이만큼 읽으며 거룩하게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는 일이 잘 안되었는데, 자기 하고 싶은 짓 다 하며 형편없이 산 다른 사람은 잘 되어서 나를 무시하는 것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이럴 때 하나님께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섭섭하고 성질나면서 왠지 손해 본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대개 이럴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과 태도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는 반항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한테 그러실 수가 있어?”, “이거 너무 한 거 아냐?”

어떻게 난 쟤보다 더 착하고 거룩하게 살았는데 재는 저렇게 될 수가 있어?”

그래서 더 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참고 회개하고 싸웠던 악들을 다 저질러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을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서 반항하듯 이 기회에 합니다.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반항할 때 부모가 싫어하는 짓을 일부러 하듯 말입니다.

 

두 번째는 체념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놈이 그럼 그렇지!” “그래 난 그런 놈이야!” 나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지지리 복 없고 재수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나님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버림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포자기 상태가 됩니다.

 

마지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날 더 못되게 할 리가 없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억울한 상황을 통해 더 믿음이 좋아지고, 더 소망이 생기고, 더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가 요셉이었다면 그 감옥에서 참 억울해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 제게 왜 이러십니까? 그렇게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 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요셉과 같은 처지에 놓은 우리를 위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 말씀이 여러분의 믿음이 되길 축원합니다. (*)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