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아브라함이 미녀는 괴로워라고 말한 사연

코이네 2011. 5. 14.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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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0장, 아름다운 아내를 사라를 누이라 속인 아브라함



창세기20장

창세기 20장에는 또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전 애굽(이집트)에서 한 번 당했던 일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지금 20장에 일어난 일이 시간상으로 언제인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창세기는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책은 아니기 때문이죠.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던 동네에서 그랄이라는 지방으로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아마 가뭄이 그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가뭄이 들면 일단 지중해연안인 그랄지방으로 옮겼다가 더 심해지면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으로 이주했거든요. 

아브라함은 자신의 터전이 아닌 곳에서 또 다른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내 사라가 너무 아름다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다음 장인 21장에 가면 사라의 임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때가 90살입니다. 사라는 이삭을 낳은 후 40여년을 더 살다가 127세에 죽었습니다. 이를 종합해보면 아무리 여인이 이뻐도 90살된 여인을 아내로 삼을려고 할까 싶기도 하구요. 그것이 걱정되어 아브라함은 사라를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동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정황으로 볼 때 이 이야기는 12장에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그 때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부분에 이 이야기가 놓인 것은 21장에 사라가 임신하게 되는 것과 결부되어서 임신하지 못하는 아비멜렉의 모든 여인들을 치유하신 것처럼 사라도 그렇게 치유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또 저처럼 주장하는 성경학자들도 있구요.

하여간 아브라함은 미인을 아내로 둔 덕에 몇 차례의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 미인을 아내로 두고 싶은 분들은 사라를 생각하며, 이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에 좀 새기면 좋겠습니다.






이 20장의 사건은 12장 애굽에서 일어난 것과는 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애굽에서는 사라의 미모 때문에 누이라고 속였고, 그랄에서는 미모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애굽에서는 사라가 애굽왕과 결혼하여 그 예물을 아브라함에게 주었지만 그랄에서는 그냥 데려갔다고만 하였습니다. 애굽에서는 재앙이 내려 애굽왕이 사라를 돌려보내주었지만 그랄왕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다음날 사라를 돌려보내주며 아브라함을 꾸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는 하나님이 치유하신 일이 없지만 아비멜렉에게는 아브라함이 기도하여 그 집안 여인들이 임신할 수 있도록 치료하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는 쫓겨나와 이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왔지만 그랄에서는 그 지역에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또 이렇게 상당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장과 20장은 같은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만 그걸 뒷받침하기에는 개연성과 증거가 상당히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또 놓쳐서는 안되는 두 가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그는 선지자"라고 말한 부분입니다. 그 선지자가 너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고,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니 그 집의 여인들이 치료가 되어 출산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보면 참 신기할 것입니다. 자기에게 힘도 못쓰고 아내나 뺏긴 별볼일 없는 사람이 아브라함인데 하나님은 그를 나의 선지자라고 말하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이렇게 쪼다같은 짓을 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이 부끄럽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둘째는 이번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겪고 있는 곤욕을 해결해주셨지 아브라함을 야단치거나 아브라함에게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아브라함을 이해하고 있고, 아브라함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그 일을 해결해주고 있는 것이죠. 또 아브라함 역시 제가 믿음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라며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이죠.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그저 넘겨서는 안될 일 같은데, 하나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기에 도대체 우리가 모르는 관습적인 것이 있나 싶은 의문도 듭니다만 하여간 그렇습니다.

저는 성경의 이런 부분을 읽으며 한 가지 삶의 지혜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에 대해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자는 것이죠. 우리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 좀 더 자유로워질 것 같습니다. 



by 소토교회 코이네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