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엘리자베스 I세 여왕 시대의 종교적 관행과 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교회의 예배와 교회의 통치 방식을 개혁하려고 했던 개신교도들이 비난 어린 어조로 1560년대부터 그렇게 불려지기 시작한 “청교도”(Precisians or Puritans)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영국과 당시 신대륙이었던 미국에서 나타나고 전개된 청교도 운동은 사실 여러 면에서 매우 범위가 큰 운동이다. 따라서 청교도 운동과 사상에 대한 조직신학적 접근은 수많은 책을 쓰도록 만들 것이다. 범위를 좁혀서, 청교도 사상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인다고 해도 결국 다양한 사상이 그 가운데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에 대한 교리에 대해서만 말해도 청교도들 가운데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와 중도적 입장을 지닌 이들(moderate Calvinists), 그리고 알미니안주의자가 있었다. 예를 들어서, 청교도 목회자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영국 교회인(English Churchman)으로 인정되는 박스터 자신은 유기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고, 또한 알미니안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었고 많은 알미니안을 요직에 등용했던 챨스 I세를 처형하는 것이 옳았다고 논의한(Eikonoklastes, 1649) 대표적인 청교도 John Milton은 그 자신이 알미니안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거나 그 보다도 좀더 독자적인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청교도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 미치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이해에서도 상당히 다른 이해가 존재하고 있다.
교회론에서는 청교도들 사이의 의견의 차이가 특히 심했다고 할 수 있으니, 청교도 안에는 국교회주의자와 장로교주의자와 회중교회주의자가 있었다. 예를 들어서, 카트라이트 등과 그의 동료들은 일종의 장로교회파라고 할 수 있으나 영국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캠브리쥐의 윌리엄 펄킨스(1558-1602)의 영향을 받아 그가 하던 캠브리쥐의 St. Andrews의 설교가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폴 베인스(-1635)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리쳐드 십스는 그를 박해하던 정부와 교회에 대해서도 충성과 자비를 나타냈고, 그는 교회로부터 분리할 의도는 없었다. 카튼과 구드윈도 영국 교회를 떠날 마음이 없었고 비록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긴 했어도 그들은 가능한 한 성공회 안에 남아 있으려고 했었다.
그런가하면 청교도들 가운데서 분리주의자들도 나타났다. 그들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결혼식을 가장한 분리주의적 회중 예배에 모인 사람들의 일부를 런던 당국이 1567년 7월 19일 체포하는 데서 시작되어, 카트라이트에게서 공부한 Robert Browne (1550?-1633)이 1580년 경 분리주의적 원리를 수용하고서 친구인 Robert Harrison과 함께 1581년에 Norwich에 독립 회중(an independent gathered congregation)을 설립하는 데서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이에 해당하는 이들로 1587년 런던에서 분리주의 집회 인도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었던 런던의 변호사 Henry Barrow(1550?-1593)와 목사 John Greenwood(?-1593), 그들에게 설복당한 청교도 목사 Francis Johnson(1562-1618)이 있으니, 이들은 1592년 죤슨을 목사로 그린우드를 교사로 하여 런던에서 한 분리주의적 회중교회를 세웠다(Puritan Separatists). 후에 이 교회와 대부분의 회중 교회는 핍박을 간신히 피하여 암스테르담으로 피하였다.
또한 제임스 I세 초기에 John Smyth(1570?-1612)가 분리주의적 원칙을 채택하고 Gainsburgh에 있는 회중 교회 목사가 되었고, 또한 Scrooby의 William Brewster(1566?-1644)의 집에서 두 번째 회중 교회가 죤 로빈슨(1675?-1624)의 지도하에 모였다고 한다. 박해가 가해지자 게인스버러 회중 교회가 1608년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였고, 스크루비 회중 교회도 화란으로 가서 라이덴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런데 1608/1609년경 스미드는 자신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물을 쏟아 부어 세례를 행함으로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화란 땅에서 형성되었고, 스미드 자신은 후에 알미니안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입장을 계속 유지한 General Baptists가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또한 라이덴 회중 교회의 일원이었던 Henry Jacob 목사(1563-1624)는 1616년에 돌아와 일부 성도들과 함께 Southwark에서 최초의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를 세웠고, 이에서 1630년대에 갈라진 일부 신자들이 벽돌 까는 이(cobbler)였던 John Spilsbury를 목사로 세우고 소위 Particular or Calvinistic Baptists가 되었고, 그들은 1641년에 침례(immersion)를 세례의 정당한 형태로 받아들였다. 또한 라이덴 회중교회로부터 일부가 1620년 오랜 논의 끝에 William Brewster의 지도하에 미국으로 가게 된 소위 Pilgrim Fathers들이 된 것이다. 바로 여기서 회중교회적인 미국 청교도 운동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또한 1640년 11월 소집된 장기 의회에 의해서 교회의 신조와 행정을 위한 규정을 만들기 위해 1643년 121명의 목사와 30명의 성도들로 구성된 자문 위원회 성격의 웨스트민스터 회의(Westminster Assembly)의 구성도 비록 구원론에 있어서는 칼빈주의적인 견해에 동의하는 이들로 구성되었지만 교회론에 있어서는 장로파(특히 스코티쉬 컴미셔너즈[Alexander Henderson, George Gillespie, Samuel Rutherford, Robert Baillie], 그리고 영국의 Edwards Reynolds)와 몇몇 독립 교회파(Thomas Goodwin, Philip Nye, Jeremiah Burroughs, William Bridge, Sydrach Simpson), 그리고 몇 감독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었음은 기지의 사실이 아닌가? 또한 그들 가운데는 John Lightfoot, Thomas Coleman, Stephen Marshall, 그리고 John Seldon 같은 에라스티안주의자들까지도 있었다. 심지어 한때(1641) Laud 등이 대표하는 주교 제도가 독재의 수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장로교주의를 주장했던 죤 밀턴 같은 청교도는 후에 장로교적 체제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장로”(new presbyter)는 “옛 사제”(old priest)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후에 리쳐드 박스터나 박스터가 존경하던 어셔 대주교(Ussher)가 제안하는 절충적 감독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장로교 제도나 주교 제도를 허용하기에는 너무 독립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청교도군의 총사령관(Lieutenant-General)이었고 후에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된 올리버 크롬웰은 스스로는 전국적인 장로교 조직이 세워져 이전의 주교 제도를 대신하게 될 것을 염려하는 독립파였으나, 그는 온건한 감독제적 청교도, 장로교주의자, 독립파, 심지어 약간의 침례교도들도 자신이 수립하는 새로운 제도권 안으로 포섭해 들였다.
또한 유명한 청교도 목사로서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영국 교회지도자”로 인정되는 리쳐드 박스터(Richard Baxter, 1615-91)는 자신이 목회하던 키더민스터(Kidderminster) 교회에서 교인들 가운데서 선택된 이들을 ‘장로들’(elders)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저 ‘집사들’(deacons or seniors)이라고 불렀고,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결과로 부과된 전국적 언약에 대해서 키더민스터의 교인들로 하여금 그 언약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였고, 우스터셔의 목사들에게도 그것을 교인들에게 부과하지 말라고 설득했을 정도였다. 그는 장로교파, 독립파, 심지어 감독파들 사이의 차이를 될 수 있는 대로 무시하고, 각 지역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공동의 목회적 사역을 위해 협동을 이루어 내려고 노력한 중도를 중시한 사람(a champion of moderation)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국교회의 교제 밖으로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1660년 왕정 복고 후에도 일정 수의 청교도가 챨스 II세의 채플린으로 임명되었고, 그들 가운데서 Richard Baxter와 Edmund Calamy는 주교직의 제안도 받았으나 고사하였고, Edward Reynolds는 Norwich의 주교가 되었고, 1662년 기도서에 감사의 글을 쓰기도 했었다.
또한 박스터는 장로교주의자나 회중교회주의자로 불리는 것도 싫어하면서 1672년에는 자신을 “그저 비국교파”(a mere Nonconformist)라고 지칭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교도 전쟁 전에 Worceter 주교에게서 임직한 그는 항상 교회 안에 주교가 있을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단 하나의 청교도 사상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형편을 잘 표현하는 것은 아마도 패트릭 맥그라뜨의 다음과 같은 표현일 것이다:
“(청교도들 사이에는) 무엇이 없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견의 일치가 있었지만,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가 없었다.”
윌리엄 플래처도 같은 뜻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혁을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청교도들은 그들이 무엇을 지지하는 지를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명확하게 그들이 무엇을 반대하는 지 알았다. 어떤 사람들은 영국 교회 내에서 개혁을 위해 일하기를 원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희망 없이 타락했다고 생각한 교회로부터 그들의 모임을 분리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적당히 개선된 주교를 용인할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스코틀랜드나 제네바의 그것과 같은 장로회 조직을 주장했으며, 말없는 다른 사람들은 각각의 회중의 독립성을 지지했다. 그런가 하면 존 로저스(John Rogers) 같은 일부 사람들은 오직 명확하게 밝힐 수 있는 종교적 경험을 가졌던 사람들만의 공동체를 받아들였다....(그런가하면) 백스터는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도리에 맞게 선한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지지했다. 어떤 사람들은 유아 세례를 받아들였고, 다른 사람들은 신앙 고백을 한 어른들에게만 세례를 주었다. 오늘날 침례 교인들의 기원은 원칙적으로 이러한 급진적인 영국 청교도들 속에 있다.
청교도주의는 이런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일반적 연대와 연합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릴란드 라이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처음부터 그들의 모습에 대해서는 “복잡한 그림”(a chaotic picture)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21 아마도 16세기 영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오늘날의 소위 “복음주의 모자이크”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청교도들의 유대감과 연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훨씬 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다양한 청교도주의를 한 마디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들어가는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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