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본문 : 마태복음 5장 43절 - 48절 2012.5.27.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주일 낮예배설교
제게 옷을 새로 사서는 이 옷 잘 어울리냐고 묻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잘 어울린다고 대답해줍니다. 어떤 일을 맡겨 두면 그 분이 한 일에 특별한 하자가 없는 경우 잘했다고 칭찬해드립니다. 왜냐면 그분의 안목과 일을 하는 방식, 그리고 생각은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큰 딸에게 옷을 잘 못 입는다고 퇴박을 종종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꿋꿋하게 제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 다닙니다. 왜냐면 제 안목도 존중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딸처럼 세련되고 멋지게 할 순 없지만, 제가 보는 관점에서는 충분히 괜찮고, 또 그런 저의 미적 감각도 엄연한 눈이기 때문입니다. 울 딸 눈만 눈인가요? 패션 디자이너의 눈만 눈인가요? 아닙니다. 제 눈도 눈이고, 다른 분의 시각 역시 그 나름 훌륭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되다 보니 자꾸 목사님 생각은 어떠시냐고 제 소견에 귀를 많이 기울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꼭 내 맘에 들어야 하는가? 제 맘에 안 들어도 충분히 훌륭할 수 있습니다. 제 안목이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웬만하면 다 좋다고 대답하고, 또 좋은 것을 애써 찾아보려고 노력합니다.
1. 원수가 누구입니까?
우리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래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이유 없이 일단 경계심을 갖고 적대시합니다. 혹시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먼저 됩니다. 그래서 서로를 탐색합니다. 이 사람은 내 편일까? 아닐까? 일단 내편이 되면 안심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적이 됩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모여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죠. 이 사회에는 나 아닌 너와 함께 공존하고 곳입니다. ‘나와 너’가 만나서 ‘우리’가 되어야지 우리가 되지 못하면 나를 해칠 수 있는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합니다. 이 적은 언제나 나를 해롭게 할 수 있고, 나의 원수가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원수가 누구입니까? 내 인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가족과 재산과 나의 행복을 빼앗고, 인생을 빼앗은 사람입니까? 평생 원망하고 저주해도 성에 차지 않을 상처를 입힌 사람입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원수라고 하고, 원수를 죽어라 미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방금 말한 원수는 나에게 나쁜 짓을 한 나쁜 놈입니다. 그런데,원수는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해를 가집니다. 앞서 말했듯이 나 아닌 너가 우리가 되지 않아 적이 된 사람, 그래서 나를 해칠 수 있는 남이 모두 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먼저 누가 내편인가를 찾습니다. 그건 바로 생존본능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원수는 선악의 개념이 아닙니다. 무조건 나쁜 놈이 내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편이 아닌 사람, 그래서 나를 해칠 수 있는 사람, 나와 뜻을 달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인 나의 원수가 되는 것이고, 그들 중에 실제로 나에게 나쁜 짓을 했을 때 바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라고 생각했던 사람 중에도 지금 내 편을 들지 않아 나를 힘들게 만들면 원수가 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원수가 될 수 있고, 형제간에도, 부부 간에도, 그리고 같은 민족 간에도 얼마든지 적이 되고,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2. 원수를 사랑하라니요?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수를 많이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원수는 남을 우리로 여기지 못하고 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눈을 뜨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내 원수로 보인다면 이것보다 더 비참하고 불행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원수를 만들지 않는 방법 중의 하나는 나와 달라도 인정해주고, 관용하고 포용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더 크게 가지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스칼라 에너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와 상대방이 마주 서서 서로를 쳐다볼 때, 나와 상대방은 각각,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과 현재 자신의 모습이 서로 반대가 되는데 이를 스칼라 관계라고 합니다. 스칼라 관계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속에서 형성되는 스칼라 에너지가 그 영역 안에 놓인 사물의 속성을 더욱 증폭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 사이의 관계로 확장시켜 볼 때, 가령 아까 마주 서서 호의적 이야기를 한 상대가 있다면 상대방과 나의 스칼라적 관계로 인해서, 상대방과 내가 형성한 호감, 믿음, 사랑과 같은 긍정의 에너지가 더욱 증폭될 것이고, 원수(적대적 상대)가 된다면 미움, 증오의 에너지는 더욱 증폭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만약 내가 먼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나와 원수 사이에 형성된 미움, 부정, 증오같은 부정적 에너지는 차츰 감소하게 되고, 내가 발생시킨 사랑, 이해, 긍정의 에너지가 자리 잡게 됩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미운 상대인데, 내 안에 쌓인 상대방에 대한 미움의 부정적 에너지 이상의 사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심력(心力)으로는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부정의 에너지를 긍정의 에너지로 바꾸는 비결, 우리 옛 선현들은 이런 삶의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옛말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꼭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불교에서 우리 인생의 고통을 업이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고통은 바로 전생의 업에 의한 것인데, 전생에 내가 저지른 악행 때문에 이생에서 고통을 받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죠. 이생에서 지금 원수가 이유 없이 당신을 파멸로 몰아갔듯이, 어쩌면 내가 전생에서 그를 파멸로 몰았을 수도 있고, 이유 없는 고통을 주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생에서 원수로부터 큰 고통을 당하고 그를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카르마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업보를 치룬 것이죠. 이렇게 생각해보면 나의 원수는 나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하늘이 보낸 사람이고,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미움보다 먼저 불쌍하다고 생각이 되고, 그런 측은지심이 생기면 용서하고 싶어진다는 것이죠.
이런 원리를 생각해본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원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먼저 나를 위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고, 정말 나 자신을 위한다면 원수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하나님은 그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 잘 듣고 착한 짓하고 예쁜 짓하는 선인들에게 좋은 공기, 따뜻한 햇볕, 맑은 물을 주시고, 하는 짓마다 난장판인 악인들에겐 오염된 공기, 오존층이 붕괴된 자외선, 물고기도 먹을 수 없는 오염된 물을 주시지 않고, 모두가 다 잘 살도록 차별 없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우리 사람의 깊은 속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 제자들을 뽑을 때, 때가 되면 어떤 놈은 예수님 팔아먹을 놈이고, 어떤 놈은 큰소리치다가 자기를 저주할 놈이고, 그리고 다 자기를 배반하고 도망갈 사람들이라는 거 다 아셨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제자를 뽑기도 전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제자로 뽑았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로 예수님은 그 사람들, 그 범죄한 죄인들을 하나님의 분노로 심판하여 멸할 원수가 아니라, 구원해야 할 불쌍한 사람들, 내가 죽어서라도 구원해야할 사람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그런 사랑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미워할 인간 미워하고, 욕할 인간 욕하고, 죽일 인간 죽이며 산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바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 아이들 말로 “찌질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찌질이들이 되길 원치 않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습이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전 일제시대 신사참배에 굴하지 않고, 여수의 나병환자촌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목회하던 손양원 목사님, 여수 반란사태가 났을 때 그의 두 아들은 한 공산당원 청년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청년을 용서하고 그의 양아들로 맞이하여 그를 살렸습니다. 그에게 붙은 별명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사랑의 원자탄이 되는 위대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미국의 위대한 흑인운동가인 마르틴 루터 킹목사님은 평화의 행진을 마친 후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연설 속에 그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시위하는 것은 인종차별하는 나쁜 백인들을 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앞으로 흑인 백인 할 것 없이 우리 아이들이 함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위대함입니다.
3. 어떻게 원수를 사랑합니까?
예전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저희가 존경하는 선생님이 지리산을 등반하자며 저희들을 이끄셨습니다. 한창 공부할 시간에 그것도 방학 때 그 소중한 시간을 빼내어 산에 오르자고 했을 때, 우리는 모두 기대를 가졌습니다. 아마 우리가 별로 존경하지 않는 선생님이 그랬다면 억지로 오르긴 했겠지만 입이 한 발은 튀어 나와 오르는 내내 불평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존경하는 선생님이 가자고 할 때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살짝 뛰었습니다. 도대체 이 산 위에 무엇이 있을까? 마침내 산 정상에 섰을 때 가슴이 터질 듯 숨이 가빴고, 몸과 얼굴에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정상에 서는 순간 우리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발 아래로 보이는 세상, 하늘과 더 가까운 곳에 선 기쁨, 정말 맑고 맑은 공기...그리고 그 무엇보다 결코 오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저 산을 내가 올랐다고 하는 성취감,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우리 마음 밑바닥에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스스로 ‘나는 훌륭하다’ 그런 자부심이 생겨났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어떻게 보면 전혀 불가능한 일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저도 이 말씀을 설교 준비하면서 한편 걱정이 된 것은 “우리 원수라도 사랑합시다”라고 말하는 순간 정말 내가 사랑해야 할 원수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걱정이 앞섰습니다. 참 못났죠? 제가 그렇게 못난 사람인 줄 주님도 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못난 저에게 또 우리에게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왜요? 주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만큼 훌륭해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님은 명령만 하시지 않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에겐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을 의지합시다. 우리의 특급 도우미 성령의 능력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멋진 그리스도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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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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