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따뜻한글

뉴욕시장 라과디아의 긍휼,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는 명판결

코이네 2014. 3. 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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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장 라 과디아, 라과디아 시장이 판사 때 했던 명 판결



 

 

미국의 뉴욕에 가면 라과디아(La Guardia)라는 공항이 있습니다. 주로 국내선이 이용하는 공항입니다. 라과디아라는 사람은 본시 1933∼1945년까지 12년 동안 뉴욕의 시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했던 훌륭하고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분은 "Little flower(작은 꽃)"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라 과디아시장에 관해 좀 더 알고 싶어 조사해봤더니 다음백과사전에서 그의 일생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두었더군요.



라 과디아(Fiorello H(enry) La Guardia) 1882. 12. 11출생 ~ 1947. 9. 20 사망,  뉴욕 출신의 미국 정치가.


라과디아시장

라디오연설을 하고 있는 라과디아시장


그는 1933~45년 3차례 뉴욕 시장을 역임했다. 애리조나 주에서 성장했으나 16세가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주했다. 부다페스트의 미국 영사관에서 근무하다가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와 유고슬라비아의 피우메로 전근했고 1906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앨리스 섬의 이민국 통역관으로 활동하는 틈틈이 뉴욕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1910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16년 하원에 출마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공군조종사로 자원입대했다. 1918년 하원에 복귀하여 군사비 지출을 반대하고 여성참정권을 옹호했으며 1922년 재선되었을 무렵에는 노동조합 근로자들을 위한 복지입법가로 명성을 떨쳤다. 1932년 스트라이크·보이콧·평화로운 시위에 대한 법원의 제재를 금지하는 노리스-라 과디아 법을 발의했다.

라 과디아는 자유당과 공화당의 연합후보로 첫번째 뉴욕 시장선거전에 임했다. 시장에 취임한 '작은 꽃'(라 과디아의 애칭)은 부패와 싸우고 노동조합을 후원했으며 시정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뉴욕 시헌장의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뉴욕을 방문중인 나치 사절단의 경호를 위해 유대인 경찰관을 배정하고 석탄파업중에는 노사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사무실의 난방공급을 중단시키는 등 드라마틱하고 다채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1941년 전미 민방위 대책위원회 위원장, 1946년 국제연합구제부흥사업국(UNPRA) 사무총장을 지냈다.



그런데 이 분이 뉴욕의 시장으로 재적을 하기 이전에 그곳에서 판사로 일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라과디아 그가 법정에 앉아 있는데 어떤 경찰관이 한 노인을 끌고 왔습니다. 죄목은 상점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전에도 훔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처음 훔쳤습니다."

"왜 훔쳤습니까?"

"예,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은 다 떨어지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빵 한 덩어리를 훔쳤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노인의 사정을 다 듣고 난 뒤에 이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노인이여,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저는 법대로 당신을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라과디아 판사는 법정 안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노인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은 비단 이 노인의 책임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도 각각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얼른 자기의 지갑에서 10달러 짜리 지폐를 끄집어내어 모자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자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돌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두어진 돈이 모두 57달러 50센트였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그 돈을 노인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노인은 그 돈을 받아서 그 가운데 10달러를 벌금으로 냈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서 그는 감격 가운데 눈물을 글썽거리며 법정을 떠났습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