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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9장, 든든히 서가는 교회 그 이유는?

코이네 2014. 6. 1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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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9장, 사울의 회심과 변화 그리고 든든히 성장해 가는 초대교회


든든히 서가는 교회, 이유는?
본문 : 사도행전 9장 26-31절
2014.6.15.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1.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예전 한 시장 어귀에 아주 낡고 허름한 술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30년동안 인테리어를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집으로 거기서 의자에 앉으면 발 밑으로 바퀴벌레가 기어다닐 것 같은 그런 허름한 집이었습니다. 당연히 장사가 안되죠. 동네 시장 사람들이 그 집을 싫어합니다. 왜냐면 그 집 때문에 동네 시장이 도매급으로 불결한 곳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집은 다른 사람이 인수해서는 간판부터 해서 싹 바꿔버렸습니다. 벽지를 새로 바르고, 바닥과 천장, 조명, 의자 그리고 메뉴까지 싹 바꿨습니다. 그리고는 바깥에 사람들이 누구나 볼 수 있게 큰 현수막을 하나 걸었습니다. 그 현수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현수막을 보고는 호기심을 갖고 하나 둘 찾아와서는 깜짝 놀랍니다. 이럴 수가 있나? 그 옛날의 흉가 같은 느낌은 하나도 없고,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오게 되고, 이 때문에 시장도 더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합니다.

 

2. 주인이 바뀐 사울의 삶
 
주인이 바뀌어 달라진 인생을 산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사울입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사울의 이름입니다. 사울이란 이름의 뜻은 큰자이고, 바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작은자인데, 큰자로 생각했던 사울이 예수 믿고 회개하여 작은 자 바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설명을 처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해석은 문제가 있습니다. 저도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를 아무리 살펴봐도 사울의 뜻이 큰 자라는 해석이 없습니다. '사울'이란 말 뜻은 도리어 "요청하다, 구하다, 걸인" 이런 뜻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작은자보다 더 작은 걸인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 사울입니다.

사울과 바울은 이렇게 다른 뜻의 말이 아니라, 사울의 또 다른 이름 즉 사울의 로마식 이름이 바울이라는 해석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행13장까지는 사울로 쓰이다가 13장에 이르면 사울이라는 바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울과 바울 이 두 이름이 다 쓰였다가 어느 시점을 계기로 바울이라고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 시점이 흔히 생각하는 사울이 회개하는 시점이 아니라 이방의 사도로 파송을 받기 시작한 때부터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로 불리다가 본격적으로 이방전도를 시작할 때부터는 로마식 이름인 바울로 더 많이 불렸고, 나중에는 바울로 굳어졌다는 것이죠.

하여간 그런 바울, 그 사람은 좀 특별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입니다. 당시 랍비 중 최고의 존경을 받는 가말리엘에게서 배웠고, 그 집안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을만큼 부유했습니다. 바울이 나고 자란 다소라는 곳은 길기리아의 큰 도시였고, 여기는 헬라문화의 집산지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로마어에도 능통했고, 율법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헬라철학에도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서울대학을 나와서 미국 하버드를 졸업한 인재 중의 인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어떻게 생겼을까요? 오래된 기록을 보면 바울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키가 작았고, 대머리였습니다. 눈썹은 일자눈썹이었고, 코가 좀 컸으며, 다리는 안짱다리였습니다. 거기다 고질병인 안질과 간질로 의심되는 질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외모는 상당한 콤플렉스를 갖게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랍비들도 외모를 상당히 따지는 편이었고, 로마는 웅변술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외모가 뛰어나야 출세하기에 좋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외모로 인해 상당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열심히 해야 자신의 신체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런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자 인생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율법에 대한 열심, 출세와 명예가 그의 주인노릇을 하였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그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형제들과 함께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며,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회당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미워하고 죽이려해도 개의치 않고 그는 복음을 전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과 깊은 교제를 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또 전도를 합니다. 더욱 특별한 것은 언어적인 문제로 서로 교류하기 어려웠던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또 전도를 합니다. 바울의 이런 변신에 놀란 유대의 지도층은 분노하여 바울을 잡아 죽이려 했지만, 교회가 바울을 보호해주었고, 그를 다소 지방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이렇게 사울의 문제가 일단락되었습니다.

 

소토교회

3. 든든히 서가는 교회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렇게 사울의 문제가 해결되자 교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뭐랄까요? 한 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지나간 것 같다고 할까요? 그리고 교회는 든든히 서가며 더욱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좋은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참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초대교회처럼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부흥하자 갖가지 위협과 위험이 잇따랐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질을 당하기도 하고, 협박과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헬라파와 유대파가 나뉘어 서로 다투기도 하고,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 교회를 분탕질치고, 교회가 안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스데반이 순교하였고, 스데반을 처형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사울이 이웃 다메섹까지 와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려 한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끊이지 않는 어려움, 당시 교회는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 난파 당하는 작은 배처럼 위태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또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위기 가운데 있을 때 왜 이런 어려움이 오냐고 불평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시련과 위기 가운데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여 이 또한 지나가게 해야 합니다. 주님은 어떠한 심각한 위험 속에서도 이를 지나가게 하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혹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지나가고 나면 또 올텐데..맞습니다. 초대교회 이렇게 사울의 문제까지 이어진 수많은 어려움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다시 또 교회는 핍박과 시련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또한 지나가게 하십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가운데 우리는 더욱 견고해지고, 건강해지고, 강력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성장시켜주십니다. 31절을 보면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시련이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 또한 더욱 넘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전화위복

그리고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초대교회는 스데반 집사님을 잃었지만 이제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할 수 있는 바울을 주셨습니다. 이전에는 유대인들에게 머물렀던 이 복음이 이제는 이방의 세계 만국 세계 만민에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시련을 통해 교회는 더욱 강력해진 것입니다. 전화위복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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