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사도행전9장,바울을 선택하신 주님, 왜 이 사람입니까?

코이네 2014. 6. 1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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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장, 사울의 회심, 바울을 선택하신 주님 왜 이 사람을 선택하셨을까?


왜 이 사람입니까?
본문 : 사도행전 9장 10-19
2014.6.8.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우리가 바울로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의 본명은 사울입니다. 그는 정통 유대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가문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넘쳐났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유대교의 이단으로 생각했고, 이들을 핍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 열심이 지나쳐서 그는 이웃 나라의 다메섹에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너무 환한 빛 가운데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누구십니까?" "나는 네게 핍박하는 예수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는 가고 있던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눈이 멀게 되었고, 근처 직가라고 하는 동네에 들어가 사흘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그저 주님이 보내신 사람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눈 먼 그 사흘동안 그는 깊이 기도하였고, 주님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사울을 눈먼 채로 있게 한 후 또 다른 사람을 부르십니다. 아나니아라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입니다.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고 그 눈을 밝게 하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그 때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해 말합니다. 이 사람은 주의 성도들에게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만일 그가 다시 눈이 밝아지면 주의 성도들을 결박하고 핍박할 것입니다. 이 말의 속뜻은 '왜 이런 사람에게 절 보내시려고 합니까? 왜 이런 사람을 택하셨습니까?' 그런 마음인 것이죠. 그러자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대답하십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그 말씀을 듣고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서 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사울을 만난 아나니아에게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전에는 사울이 원수였는데, 이제 그는 사울에게 형제라고 부릅니다. 왜죠? 이제 사울도 예수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의 눈을 다시 보게 만들고, 성령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 순간 사울의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고,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먼저 그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형용할 수 없는 밝은 빛 가운데서 자신을 향해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러 가고 있는 것이지? 이전까지 예수님에 대해 분노가 가득하고, 살기등등한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 아주 중요하고,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하나님을 핍박하고,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캄캄한 암흑이 찾아왔습니다. 밥을 먹을수도 물을 마실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는 참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깊이 기도하면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실체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보내주신 사람, 자신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인도해줄 안내자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아나니아를 만났을 때 그 칡흙같던 어둠이 걷혀지고, 그는 이제 예수의 사람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울의 이러한 경험은 사울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경험입니다. 우린 대부분 예수 믿으면 복받고, 예수 믿으면 천국가고, 예수 믿으면 뭔가 안심되고, 병도 낫고, 안 믿는 것보다는 믿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믿기로 하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기 시작하다가 점점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사울처럼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할 때 많이들 당황합니다.

전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은 뒤에서 부는 바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더 힘있게 달릴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어서 내 인생길이 거침없이 그렇게 달려가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또한 앞에서 부는 바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 앞으로 오는 모든 장애를 시원하게 날려버려주길 바랍니다.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챙겨주는 그런 예수님을 믿고, 내 인생의 성공가도를 씽씽 달려가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런 성공가도를 달리게 하기 전에 우리가 가는 길을 꺾어버립니다. 사울처럼 말입니다. 그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확 꺾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조금씩 꺾기도 하십니다. 많이 꺾이든 적게 꺾이든 그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방향을 전환하게 되는 것이죠. 이전에 목표했던 그 길이 아니라 새로운 목표를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제대로 믿기 시작하면 우리는 갈등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 되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길을 꺾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고민하게 되고, 때로 추락하게 되기고 하고, 사울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주님이 보내시는 그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 눈이 어두워졌듯이 그런 시간을 지나게 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제껏 내가 살아왔던 그 인생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돈을 잘 벌길 원하시는 분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할 때 그는 이런 생각을 가집니다. 이제 주님께서 내게 복을 주셔서 사업이 번창할 것이다. 난 돈방석에 앉게 될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꾸 우환을 주십니다. 사업이 잘 안되길 시작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 길을 자꾸 꺾어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그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라는 신호인데, 이 분은 예수 믿으면 이런 우환에 시달리니 안 믿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럴 때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왜 접니까?” 그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용할 내 그릇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사람입니다. 예수의 사람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내 뜻을 따라줘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내 인생의 성공길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제가 어떤 사람 되기를 원하십니까?” 사도 바울에게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방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과 그 때문에 너는 고생을 엄청나게 할 것이다.

주님은 바울이 이렇게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의 평생을 다해 주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하였습니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그는 주님께 늘 감사합니다. 분토만도 못한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도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두고 난 죄인의 괴수라고 하며, 자신을 구원하시고 사도로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감옥에 갖힌 것 빼고는 다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 왜일까요?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고생할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안락과 출세와 부귀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고생 쯤 능히 감당할만하다는 것입니다.

 

지미카터_헤비타트운동 집짓는 대통령 지미카터 전 미대통령

미국의 대통령 중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링컨이고 하나는 지미 카터 대통령입니다. 링컨은 재임기간 중 가장 훌륭한 일을 해서 사랑받았던 대통령이고, 카터 대통령은 퇴임 후에 더 훌륭한 일을 해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카터는 퇴임 후에 헤비타트 자원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집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일입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그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땀을 뻘벌 흘리며 일을 합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한 기자가 힘들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백악관을 나올 때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절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헤비타트 운동을 알게 되고 그 일을 하면서 저는 대통령이나 주지사로 있을 때보다 더 큰 행복을 얻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의 희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상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는 길을 살짝 살짝 흔드는 것 때문에 고민스러우십니까? 그럼 물어야 합니다. “주님 왜 이러십니까?” 혹 바울처럼 너는 내 그릇이며 그 때문에 너는 고생을 많이 할 것이라는 대답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고생을 하더라도 정말 보람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