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마태복음 5장, 예수님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치, 온전히 사랑할 때 온전한 사람이 된다.
마태복음 5장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보다 한 술 더 뜬 이야기를 하신다. 어찌보면 정말 현실성이 없는 불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복수하지말고, 네 것을 달라거든 그냥 다 주어라.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줘버려라. 원수도 사랑해라. 이 말씀을 들으면 일단 세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첫째는 이러고 과연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상담 : 무엇이든 다 퍼주는 사장님, 심지어 카드빚까지 내어 돈 꾸어달라는 사람에게 의심없이 꾸어주는 사람, 그래서 아직 받지 못한 돈이 2억이 넘는다고 한다. 정말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이 걱정이 될까? 이렇게 하는 것이 고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착한 사람이지만 그가 빌려준 돈을 다 떼일 수 있다. 이미 사람들은 그가 그런 사람인 것을 알고 이렇게 이용해먹는 것이다. 아직은 버틸 수 있지만 그도 한계에 부딪히면 어떻게 될까? 아마 돈떼먹은 사람들을 원망하며, 사회를 원망할 것이다. 착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런 배신감을 견뎌낼만큼 그 마음이 강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보면 착하다고 칭찬해주기 전에 걱정부터 되는 것이다. 과연 저 사람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의 현실에서 본다면 이건 지극히 위험한 것이고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둘째는 이렇게 말하는 당신은 정말 그렇게 사는가?
쇼펜하우어라는 염세주의자가 있다. 그런데 그는 당시 독일이 희망이 없으니 그냥 자살하는 것이 낫다고 자신의 철학적인 이론을 펴서 수많은 청년들을 자살에 이르게 했지만 그는 오랫동안 살았다. 그당시로는 최상수의 삶을 살다 죽었다. 그가 죽고난 뒤 그의 유품을 뒤져보니 자신이 나온 모든 신문기사와 평가를 스크랩해두었다. 인생무상을 외치던 사람이 정작 속을 들여다보니, 그는 현세의 명예와 부귀에 목을 걸고 살았던 것이다.
(위 내용은 제가 잘 못 알고 있었던 내용이라 삭제하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그저 생의 염증을 느끼니 죽는게 낫다는 식의 염세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고 혹 자살한 사람도 있었기에 그런 오해를 받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신문기사를 스크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그를 표리부동하고,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 저처럼 잘못 알고 계신분들을 위해 위 문장을 그대로 두니 저처럼 실수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어땠는가? 예수님은 그가 하신 말씀처럼 살았다. 원수를 저주하지 않고 사랑했으며, 그들을 용서하고, 그뿐아니라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죽었다. 그리고 그 원수같은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우리도 그처럼 되려고 믿음을 갖는 것이다.
셋째, 굳이 그렇게 살아야 하나?
사실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 꼭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내가 그렇게 희생한다고 해서 세상이 알아줄 것도 아니고, 나 하나가 변한다고 해서 세상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도리어 나만 바보되고, 나만 손해볼 수 있는 짓을 왜 해야 하는 것인가? 모두가 다 같이 그렇게 한다면 몰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사람들부터 하라는 것. 그게 문제인 것이다. 섶을 지고 불속에 들어가는 것 같은 상황, 왜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신다.
주님은 이러한 세 가지의 질문에 한 마디 말로 답하신다.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온전해야 한다."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저 대충 이 땅에 살다가 생명을 다해 죽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하라, 헬라어로 텔레이오스라는 이 말은 완전하다, 성숙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우리가 그렇게 완전할 정도로 성숙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왜 이런 기대치를 우리에게 갖고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럴 수 있는 사람 그럴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주님은 또한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을 의지하며 매일매일 주님 곁으로 나아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처럼 내 원수를 위해 축복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참 행복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무한 자부심 그것은 온전한 사랑에 있는 것이다. 온전한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바로 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 사람, 그 모습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우리도 주님처럼 가져야 한다. 현재에 머물지 말고, 좀 더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년에 이런 고백을 했던 것이다.
빌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