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창24:61] 그대를 사랑합니다(이삭의 결혼)

코이네 2016. 5. 20.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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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합니다.

본문 : 창세기 24: 61~67

2016.5.1.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어린이주일)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후 혼자 있는 모습을 딱하게 여겨서 그의 갈빗대를 빼어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아담이 잠에서 깨어보니 낯선 여인이 하나 있는데, 그 모습이 자기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외치며, 그녀와 함께 가정을 꾸리며 살아갑니다. 인류는 이렇게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번성했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남녀가 서로 끌리며 사랑한다는 것은 태초의 인간 때부터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으며, 사랑하는 연인을 만났다는 것은 자신의 뼈를 찾은 것과 같은 행복감을 가지게 합니다. 즉 사람은 남녀가 사랑함으로써 온전하게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것을 부모를 떠나 하나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는 것은 참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면 둘 다 바보가 된다고 합니다. 눈에 콩깍지가 싄다고도 합니다. 사랑에 눈멀게 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고,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맹목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녀의 사랑은 상당히 위험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녀가 만나 바보가 되고, 또 맹목적으로 몰두하게 되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렇게 사랑하게 하도록 만드신 것이죠.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해야 사람들은 자기라는 굴레를 벗어나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할 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항상 자기라는 굴레 안에서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불쌍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한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고독은 나병과 같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교제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한 채 홀로 살아가게 되면, 그것은 마치 나병을 앓는 것과 같다는 것이죠. 나병이라는게 무서운 것이 자신의 몸이 썩어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고통이 없어요.그런데 어느 날 몸이 썩어들어가고 살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이 때가 되면 늦은 것이죠. 고독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난 홀로 있어도 괜찮다. 하지만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홀로 살아가는 고독한 사람은 나병처럼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그 고통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 그게 고통스러운지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장 괴롭게 하는 병 중의 하나가 바로 고독의 병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 고독의 병에 쉽게 걸릴 위험이 있습니다.

 

남녀의 사랑은 바로 이런 고독의 병을 치료하는 치료약입니다. 신기하게도 아주 못된 사람이라도 이성에는 끌리게 되고, 그 이성을 향해 뭔가 좋은 것을 주고 싶어지고, 그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을 해주고 싶고, 그러면서 이타적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마침내는 그 이성과 함께 살면서 행복해지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갖게 되며, 부부가 되어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인류가 또 생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간의 사랑은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끌립니다. 호감이 생기게 됩니다. 자꾸 좋아지는 마음이 생기고, 함께 있고 싶어지고, 함께 있으면 행복해집니다. 자꾸 만나고 싶어지게 되고, 서로에게 열중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탐색합니다.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까? 그런 신뢰감이 생기면 결혼하고자 합니다. 여기까지가 결혼하기 전까지 연인들이 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뜨겁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사랑에 눈이 뜨지면 바보가 됩니다. 콩깍지가 씝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 제대로 되면 결혼이라는 새로운 과정으로 나가지만, 잘못되면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겪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며 노래하게 됩니다. 더 잘못되면 조금 전까지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 주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한 순간 철천지원수가 되어버립니다. 어긋난 사랑은 사람을 서로 원수가 되게 하는 독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단계를 넘어 결혼을 하게 되면 삶의 조화를 이루는 사랑으로 변해집니다. 연인 때처럼 그렇게 열렬하게 뜨겁지는 않지만 상대를 배려하며 사는 게 무엇이라는 것을 체험으로 느끼게 됩니다. 결혼해서 갖는 첫 위기 있습니다. 바로 주도권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게 부질 없는 것을 알면 서로 맞춰 살아가는 비결을 익히게 됩니다. 우린 서로 참 다르다. 이걸 인정하고 서로를 배려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실망할 만큼 실망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실망한 후에 불쌍하다, 나라도 곁에 있어줘야겠다는 긍휼의 마음이 생기고, 그런 사랑이 서로의 결점을 극복하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면 뜨거운 사랑이 식어버린 것이 아쉬워 한 눈 팔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상대가 아플 것이라는 생각에 참게 되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런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 속에서 사랑은 점점 성숙해지고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1936년 윈저공이 에드워드 7세로 영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8개월이 지난 어느날 그는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났고, 6개월후 이혼녀인 윌리스 심프슨과 결혼합니다. 그는 당시 국법으로 왕이 이혼녀와 결혼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서 결국 왕위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왕위를 버린 것입니다. 심프슨 부인은 오랜 뒤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슬픔을 만날 때마다 그의 희생과 사랑을 생각했다. 나는 잠시 동안 슬플 자격조차 없다. 왕관보다 왕국보다 더 큰 사랑, 막대한 부와 권력보다 나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랑을 받은 것이다."

 

오늘 본문에 이삭이 이제 결혼을 합니다. 자기가 찾아온 사랑스런 여인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을 받고 그 종이 데려온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이에 대해 어떠한 불평도 하지 않고, 그녀를 자기 장막으로 들여와 부부로 살아갑니다. 성경에 아마 가장 잉꼬 부부라고 한다면 이삭의 부부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결혼해서 사랑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후배가 너무 효자이다 보니 배우자도 부모님이 골라 준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몇 년 뒤 잘 지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연애하고 결혼하는데 우리는 결혼해서 이제 연애합니다. 요즘 너무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에도 수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맨 처음의 사랑은 소위 "만약에" 식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만약" 우리가 어떤 요구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얻어지는 그런 사랑입니다. "너 말 잘 들으면 아빠가 귀여워하지", "나한테 선물을 준다면 당신을 사랑할거예요", "당신이 성공해서 유력해지면 당신 을 사랑하겠어요", "저하고 결혼 약속해 주시면 당신께 사랑을 바치겠어요." 이것이 가장 흔한 식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둘째 번의 사랑은 "때문에" 식의 사랑입니다.

여기서는 어떤 사람이 받는 사랑이, 그의 됨됨이 소유 혹은 그의 행위 자체 때문입니다. 한 개인에게 사랑을 받게 할 만한 어떤 우수성이나 조건이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이다지도 아름답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게 이렇듯 잘해 주시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세번째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의 사랑이라 하겠읍니다.

이것은 "만약에"식 사랑과 "때문에"식 사랑과 다릅니다. 이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이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사랑을 한자로 쓸 때 [愛]를 씁니다. 이 사랑 [愛]자는 받을 [受]자 한복판에 마음을 써 넣은 것입니다. [마음을 받는 것이 사랑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수여받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을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사랑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서로 따뜻한 말과 웃음과 애정을 주고 받는 곳에 있습니다. 정다운 말과 애정을 서로 주고 받지 못할 때에 인간에게 불행이 시작됩니다.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할 때에도 괴롭습니다. 주고 싶은 때에 주지 못하는 것도 괴롭습니다. 받고 싶은데 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없습니다. 줄 사람한테는 사랑을 주어야 하고 받을 사람한테는 사랑을 받는 것이 조화입니다. 사랑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한 성인은 이런 말을 합니다. “연애를 해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다.”

 

더 멋지게 사랑하고 행복한 우리 소토교회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