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 묵상

향유 옥합의 향기, 주님도 위로 받고 싶으셨다

코이네 2017. 11. 11.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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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4:6~9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라. 이 여자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는데 왜 괴롭히느냐?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주변에 있으니 너희가 마음만 있으면 아무 때든 그들을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고 또한 높이 평가될 것이다."

 

 

성경이 정체를 밝히지 않는 한 여인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자리에 몰래 들어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 옥합을 깨뜨리고 그 머리에 부었다. 이 향유는 여인들이 어릴 때 결혼 지참물로 가져가기 위해 아끼고 아껴 모은 것이다. 결혼해서 몸의 냄새를 씻고,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사용하기도 하고, 혹 이혼을 당하게 되면 팔아서 생활비로 충당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여인에게 있어 향유는 단지 돈의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향유는 한 여인의 인생 전부가 담겨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귀한 것을 아낌 없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한 번에 다 쏟아 부었던 것이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여인은 향유를 부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그 발을 적시며,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고 하였다.

 

계산이 빠른 가룟 유다는 그 향유의 가격이 무려 삼백 데나리온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것이니 이 향유는 노동자의 일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유다는 그 돈이 너무 아까웠다. 자신에게 맡겼더라면 이렇게 어이없이 쓰지 않았을 터인데, 이 미련한 여인은 돈을 아주 헛되게 썼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도 가룟 유다와 같은 생각을 갖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다. 황제 목욕도 아니고, 한 번에 그치는 사랑 이벤트로는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인의 행동은 과했다.

 

 

왜 이 여인은 이런 어이없는 행동을 했을까? 성경은 이에 대해 침묵한다. 아마 그 여인이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여인이 직접 왜 이런 일을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여인의 한 행동에 대해 상상력을 가지고 짐작하며, 또한 자신의 처지에 따라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 판단한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무리 예수님이 고마워도 과연 삼천만원이나 되는 향유, 아니 한 여인의 인생 전부가 담긴 옥합을 한 번에 깨뜨려 예수님께 드릴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그런 무모한 사랑을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의 기준이 앞 뒤 가리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을 불사르는 무모함이라 한다면 난 도저히 이 여인의 사랑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다. 여인이야 사랑하니까 이런 행동을 했다손 치더라도 생각이 반듯하신 예수님이라면 이런 여인의 행동을 제지해야 했다. 또 이런식의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좋은 말로 타일렀으면 어땠을까? 만일 그랬다면 지금 교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과소비적인 행태들에 경종을 울렸을 것이다. 무모함을 벗어나 몰상식한 행동이 마치 최고의 헌신처럼 이해되고 또 그렇게 강요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비신앙적인 행태가 합리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한 행동이 좋았나보다. 그저 좋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을 칭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이 왜 그리 좋았을까? 세 가지를 생각해봤다.

 

첫째,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제자들. 예수님과 함께 참 많이 고생했다. 함께 동고동락하며 그들은 나름 꿈을 갖고 있었다.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며, 우리는 그 덕을 볼 것이라는 야무진 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다 예수님 덕볼 생각에 그리고 누가 더 많이 그 덕을 누릴 것인가로 신경전이 펼쳐졌다. 모두가 예수님 덕볼 생각에 빠져 있는 그 자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던지며, 그걸 예수님께 다 드려버리는 무모한 여인이 등장한 것이다. 다 받을려는 욕심에 가득한 곳에 아낌 없이 다 드리는 자가 등장했으니, 그 여인이 얼마나 이뻤을까?

 

둘째, 향기다. 기분 좋은 향기. 남자들만 13명이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에 어떤 냄새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모두가 다 욕심 가득한 눈빛을 하며, 속내를 감추기도 드러내기도 하며 긴장감이 팽팽한 그 자리에 갑자기 향기가 가득하였다. 좋은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평안케 해주고, 상한 감정도 치유해준다. 이제 곧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데, 그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어두웠던 그 예수님의 무거운 마음에 사랑스런 향기가 가득한 것이다. 그 향기 맡을 때 예수님의 기분이 어땠을까 상상이 가는가? 어쩌면 방금 전까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저런 것들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 싶은 누구 말마따나 '내가 이럴려고 구세주가 되었나 자괴감이 든다'는 심정이었다면, 그 향기를 맡자마자 '그래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 이들을 살려야지' .. 예수님은 행복한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셋째, 예수님도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다. 며칠 후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체포되고, 온갖 조롱과 모욕, 멸시,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럽고 비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있다. 우리 생각에 예수님이라면 아무리 십자가의 죽음이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당당하게 그 길로 갈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주님의 생각이 어떤 지 아는가?

 

막14:34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하여 찢어질 것 같구나!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얼마나 힘들었으면 땀이 핏방울이 되었겠는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온전한 인간 예수는 신적인 능력으로 그 고통을 벗어나지 않고, 인간이 갖는 그 약함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하신 것이다. 예수님 제자들에게 내색은 하지 않으셨지만 너무 힘드셨다. 예수님도 위로 받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기도하고 찬양할 때마다 "내 마음은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하면서 날 위로해달라고 요청하기만 하지 예수님을 위로하려 하지는 않는다. 제자들도 그랬다. 그런 오직 한 여인. 이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에게 위로가 되었다. 이 여인이 위로하려고 해서 하는 행동은 아닐 지 모르겠다. 하지만 옥합을 깨뜨린 이 여인의 행동은 주님께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여인을 칭찬하고, 고마워한 것이다.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