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요1:1]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 박동진목사

코이네 2018. 5. 2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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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본문 : 요한복음 11- 14

설교 : 박동진 목사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몇 명의 천사들이 우주 공간을 날고 있습니다. 이 은하계 저 은하계를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다가, 그들은 마침내 태양계에 접어들었습니다. 한 천사가 말합니다. 저기 저 별이 보이니? 어디 별이 어디에 있어? 저기 있잖아 저기 아주 작은 별, 저 별이 좀 특별해 보이지 않니? 뭐가 특별해? 내가 보기엔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데, 그리고 별 전체가 쓰레기 천국인걸. 그리고 저 별 속에 사는 생물들을 봐. 모두 희안하게 생겼지 않냐? 그리고 인간들을 봐, 정말 우습게 생겼다. 그런 거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는데. 그러자 다른 천사가 말을 합니다. 그렇지? 그런데 난 도무지 이해가 안가. 저 별에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직접 내려가셨어. 그것도 영광의 위엄을 갖고 가신 것이 아니라, 저 이상한 인간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인간이 되셔서 인간들과 함께 사셨다는 거 아냐. 뭐 정말이야?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어떻게 하나님이 저런 지저분하고 괴상망측하게 생긴 인간이 되셨다는 거야. 거짓말하지 말아라. 뭐 엽기 영상 찍는 줄 아냐? 사실이야. 근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저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거 아냐. 허걱. 아이고 머리 아프다.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우리 사람들은 항상 자기 중심적이어서 사람이란 존재가 아주 위대하고 중요한 듯이 생각하지만, 우주 전체를 두고 보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구라는 별 자체가 보이지 않을만큼 작은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물 중의 하나가 인간이지 않습니까? 조금만 넓게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제 주제를 몰라요. 사람이 제 주제를 모르면 은혜를 모르고, 감사가 없습니다.

 

천사들이 보기에 어떨까요? 그들은 아마 정말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런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제 주제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해, 이 보잘 것 없고 볼품없는 작은 별 지구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그런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 그렇게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고마워해야 할 인간들은 정작 예수님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핍박하고, 나중에는 죄를 뒤집어 씌워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이러한 일은 전 우주사에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그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패악무도한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들을 양자로 받아들이셨으며, 그들을 통하여 이 보잘 것 없는 지구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성육신 하신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일뿐 아니라 전 우주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너무 쉽게 이러 저러한 말을 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그 속에는 도저히 우리가 풀려고 해도 풀 수 없는 신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온 우주의 중심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순간 우리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기을 맞게 되고, 인류의 역사는 새로워졌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이 부분을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여인이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이를 임산하였을 때, 마귀는 이 여인을 해하고자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떨어뜨리고, 여인이 아이를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지켜서 있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입에서 물을 토하여 아이와 여인을 수장시키려 하지만, 하나님은 미리 피난처를 예비해 두시고, 아이들 때가 될 때까지 숨겨두어 기르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상징적으로 표현된 말씀은 예수님 탄생시의 역사적인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은 여인의 몸에서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길에서 여행 중에 태어났고, 짐승들의 구유에 뉘여 있었습니다. 헤롯은 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아주 잔혹한 일을 벌였지만, 모든 위기를 벗어나 나사렛이라는 작은 촌 마을에서 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났던 것입니다. 이 촌사람이 역사의 중심이 되며,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신 것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2. 빛으로 오신 예수님

 

나는 가끔 목사로 살아가고 있는 내가 참 신기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저 먼 이스라엘의 한 촌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나는 무슨 맘으로 그분을 믿겠다고 나섰으며, 지금은 그분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드리며, 그분을 위해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내 개인뿐 아니라 우리 가문의 영광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여러분은 어떠세요?

 

요한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말씀이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로는 로고스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우주의 근본, 사물을 존재하고 설명하는 근본 원리, 진리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하나님, 창조하신 하나님이며, 예수님을 빼면 모든 사물들은 그 존재 원리와 가치를 찾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사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그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생명체는 다 생명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생명은 다 한정적입니다. 때가 되면 생명의 기운을 다하게 되어 죽게 되거나 사라지게 됩니다. 마치 건전지가 다 되면 멈추는 로봇처럼 우리 인생의 생명도 그러합니다. 제한된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10대나 20대를 보면 성장하고 있는 것이지만, 50대 이상을 보면 살아있지만 죽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은 이와 다릅니다. 제한된 생명이 아니라 영생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단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영생하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가질 때 사람은 좀 더 본질적인 소망과 인생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이 없는데, 어떻게 영원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로 예수님을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두움이 무엇입니까? 어두움은 빛이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빛이 비치게 되면 자연히 어둠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흔히 이 세상을 어둠의 세계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둠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만연하고 있고, 그런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을 잃어버린 채 어둠 가운데 거하게 하면 길을 잃어버리게 되듯이, 빛을 잃어버린 인생은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런 시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어렴풋이 보인다. 안경을 끼지만 초점이 맺혀지지 않는다. 안개와 어둠이 덮힌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았는가? 내 눈의 빛이 사라졌다. 이미 마음의 빛도 사라진지 오래, 꿈조차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잠을 잘 때도 안경을 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12:46).

 

3.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5절을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깨닫지 못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우크탈람바노라고 합니다. 앞의 우크는 영어로 ‘not’ 아니다라는 뜻이고 카탈람바노라는 말은 이해하다, 붙잡다, 따라잡다, 이기다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번역할 때 번역본마다 조금씩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개역성경은 깨닫지 못하더라고 해서, 우리가 읽은 본문의 전체적인 맥락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어두워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본론적인 이야기는 이를 뒷받침해줘서 예수님이 마침내 십자가를 지게되었다는 것으로 말씀을 풀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다른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어둠이 이기지 못하더라, 어둠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더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대로 이해한다면 빛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니 빛이 없어서 세상을 덮고 있던 어둠이 이 빛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말씀은 빛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비추었으며, 어둠은 어떻게 물러가게 되었는지, 그래서 마침내 세상의 어둠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지요.

 

둘 다 가능한 번역이지만 저는 두 번째 어둠이 이기지 못하더라가 더욱 성경 전체적인 맥락에 맞게 해석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이 빛이 세상에 오자 세상의 어둠은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으며, 마침내 완벽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을 생각하면 그저 무섭다고만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말이 크고 무서운 날이기는 하지만 소망의 날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둠이 완전히 무너지고, 심판받는 날인것과 동시에, 이 빛으로 인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어져서 우리가 그곳에서 왕이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두고 말세라고 하면서 곧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세상은 망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다 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 덮힌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망합니까? 그 어둠에 빛이 비쳐서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빛은 두 가지의 역할을 합니다. 하나는 이 빛이 비추게 되면 사물이 온전하게 보이게 됩니다. 어둠이 사라지면서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어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이 어둠을 이겨내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 원인을 찾아보고 진단하고, 그리고 대안을 만듭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어둠 속에서 그것을 물리칠 수없습니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물러갑니다.

 

요즘 X파일이 어떠니 하면서 정치권이 난리입니다. 절대로 도청 감청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사실 알고보니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때도 도청과 감청이 있었고, 휴대폰은 절대로 도청당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휴대폰의 대화도 도청되고 있었습니다. 지금 노무현 정권에서 우리는 절대로 도청한 적이 없다고 성명을 발표했지만 이 말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불법적이고 반 인권적인 일들이 어둠 속에 묻혀 있었는데, 여기에 빛이 조금 비치자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빛이 강하게 더 넓게 비칠수록 숨겨진 것은 더 많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드러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만 이러한 불법들이 제대로 바로잡기 위해서는 여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져야 합니다.

 

빛의 두 번째 역할은 길을 찾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제대로 보이니까 방황하지 않고 제대로 길을 가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빛이 인생에 비칠 때 어둠에 방황하던 인생이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어둠에 대해 패배적인 생각을 갖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어둠에 대해 도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칠 때 저 어둠은 반드시 물러가데 된다는 믿음을 갖고 세상을 도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말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어둠의 역사가 빛의 역사로 인해 마침표를 찍는 것이며, 그 사명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위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듯이,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어둠이 있는 곳에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비추는 것입니다.

 

이 빛이 한 개인에게 비치게 되면 그를 둘러싼 인생의 어둠이 물러가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수요기도회 때에 우리는 상상으로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에 방을 만들고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예수님이 이 방에 들어서자 예수님의 광채가 온 방을 채웁니다. 그리고 이 빛은 나의 모든 삶의 구석구석에 미쳐서 나의 삶을 밝혀줍니다. 이 때 우리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나의 어둠을 주님께 보여드리고 나의 어둠의 자리로 주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주님, 여기 나의 어둠이 있습니다. 여기를 당신의 빛으로 비춰주십시오. 마침내 주님의 광채가 우리를 온전하게 덮을 때 우리는 성령충만을 경험하게 되고, 주님의 빛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빛이 그 가정에 비치게 되면 그 가정이 새로워집니다.

 

사회에 비치면 사회가 달라집니다.

 

역사에 비치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한 나라에 비치면 그 나라가 달라집니다.

 

온 세상에 비칠 때 온 세상이 달라집니다.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