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 시사

예수님은 자살한 사람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2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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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자살한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죽은 사람(사자)에 대한 예의


자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교인들과 함께 대화하다 보면 자살에 관해 많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리고 이전 자살한 연예인들 중 다수가 기독교인들이었고, 또 그 중에는 신앙심이 좋다고 소문난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자살한 사람에 대해 우린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교회의 교리로 본다면야 ‘자살’이란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할 만큼 엄격히 금하고 있는 어떠한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생명의 주관자인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이며, 어떠한 극한적인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거나 해결해주실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저버리는 불신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교리에 엄격한 교단에서는 아무리 신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자살하였다면 지옥에 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장례도 집례해주지 않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독교 장례예식은 대부분 예배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자살한 교인을 두고 설교하면서 천국을 말할 수도 더욱이 심판에 대해 설교할 수도 없는 상황적인 딜레마를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일 예수님이 지금 이 시점에 오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우리가 신앙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리에 집착하면 답이 보이지 않지만, 순수하게 예수님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길이 보인다. 그렇다면 진행 순서대로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을 지를 상상해보자. 이는 요한복음 11장에 있는 나사로의 죽음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1. 죽음의 소식을 듣고 찾아 오셨다

예수님은 사람을 찾아오신 분이다. 그는 그를 원하는 사람을 기다리기보다 찾으러 다니셨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분의 발을 ‘먼지 묻은 발’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만나는 대상 또한 구별이 없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그를 좋아하건 적대시하건 누구나 만나셨다. 심지어 율법으로 접촉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 이방인들과 사마리아사람들, 격리되어 살아야 하는 나병환자들, 인간쓰레기로 취급받던 세리들과 죄인들, 창녀들까지 만나서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이 붙여준 별명이 “세리와 창기의 친구”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병으로 죽은 나사로를 찾아오셨다. 예수님의 만남에 결격 사유가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 스스로가 나는 죄인을 만나기 위해 오셨다고 선포하셨고,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인이다. 만약 지금 이때에 예수님이 계셨다면 고 노무현 대통령이나 기타 자살한 사람의 소식을 들으셨고, 그들의 장레식에 가야할 관계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서슴치 않고 그 장례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2. 유족을 위로 하셨다

예수님이 당대의 다른 율법학자나 율법선생들과의 큰 차이는 긍휼에 있다. 그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가에 고민했고, 그 해결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 이전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우선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도록 율법을 가르치셨다. 그래서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치유하실 때 율법학자들은 안식일 율법을 어겼다고 공격하는 그들을 향해, 안식일에 좋은 일 하는 것과 나쁜 일 하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율법이 갖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인가를 질문하셨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치료해주시며, 자신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병으로 죽은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형제들을 위로하셨다. 그처럼 지금 이 때에도 주님은 슬픔을 당한 유족들을 찾아오시어 그들의 손을 잡으시고 그들과 같은 비통한 심정으로 고통을 나누시며 위로해주셨을 것이다. 

3. 눈물을 흘리셨다

나사로의 무덤으로 발길을 돌리신 예수님은 그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우셨다. 그 눈물의 의미는 수많은 신학적인 해석을 낳을 수 있기만 그저 단순하게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생의 비극에 관한 슬픔의 표현이다. 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랑하는 자가 영생을 누려야 할 인간이 죄 때문에 저리 비참하게 죽어 무덤에서 썩어가는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 오셨다면 어땠을까? 아마 예수님도 우셨을 것이다. 그렇게 비참한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끓을 수밖에 없는 그 절박함에 대해 안타까워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황망히 남편을 아버지를 여의게 된 그 가족의 슬픔, 그 눈물에 가슴 아파하셨을 것이다. 그들의 눈물을 닦으시며 그들이 슬픔을 조용히 보듬어 주시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또 마음 한편으로 그렇게 막바지에 몰리더라도 나를 찾을 순 없었느냐? 내가 내미는 손을 잡을 순 없었느냐? 죽는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닌데, 죽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그런 각오로 끝까지 살아서 해결해볼 수 있지 않았겠는가? 내가 널 도울 기회마저 앗아가 버렸구나, 왜 그랬느냐? 그런 안타까움으로 우셨을 것이다.  

4.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은 그런 비참한 죽음 가운데 있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불러내어 살리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분의 명령에 죽었던 나사로가 멀쩡한 모습으로 무덤 문을 열고 가족들 앞에 나타났다. (유대인의 무덤은 동굴을 뚫어 만들기에 매장하는 우리의 풍속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한정된 삶이 다가 아니라 영생이 있으며, 하늘나라의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주님이 봉하마을에 오셨더라면 어찌하셨을까? 내 개인적인 바람으로 살려주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좀 더 우리 곁에서 이전의 황제적이고 독재를 일삼았던 대통령과는 다른 국민과 소통하고 국민을 섬기며, 한 촌로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울고 있는 가족을 위로하고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그는 끝내 우리 곁을 그리 떠나갔다.

그런데 조심할 것이 있다. 그를 다시 죽이지 않는 것이다.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것이 예수님이다. 그런데 이 땅의 수많은 자칭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교리와 개인적인 관계에 얽매여 그를 다시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정치적인 목적과 개인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그를 다시 죽이는 일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삶을 미화시켜 영웅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고 폄하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그것은 고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다. 

나는 김제동씨가 쓴 추모글이 참 가슴에 와닿는다. 그 중에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고인을 죽음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 만나 뵈면 꼭 따지겠습니다...그리고 제가 옳을 거라고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신합니다...삶과 죽음은 하나이지만 선택은 우리의 몫이 아님을...건방지게 여겨지셨다면 술 한 잔 주시지요... 그곳에서 나중에...뵙겠습니다” 

프레시앙 기사 중에 한 변호사가 쓴 글미에 이런 표현이 있더군요.

“하나님도 당신을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그의 자살을 동정하거나 미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도리어 만날 수 있으면 그리하면 안 된다고, 그리고 당신의 문제가 아무리 힘들고, 당신 생각에는 죽음 외에는 길이 없다고 보여지더라도 하나님에게는 길이 있지 않겠냐고 권하고 싶다. 나는 그 때문에 참 많이 울었다. 그 눈물 속에는 그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지 못한 후회의 눈물도 한 몫을 차지했다.

기독교인들이여 마음을 좀 더 넓게 열고 살면 좋겠다. 예수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