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 문화

국악찬양을 통해 본 한국교회와 음악문화/문성모교수

코이네 2015. 12. 29.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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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음악문화

문성모 (대전신학대학교 총장)

 

1.  근대음악 문화적 입장에서 본 한국의 위치

 

우리나라에는 두 종류의 음악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소위 국악이라고 불리는, 우리 민족과 수천 년 간 그 역사를 같이 해 온 전통음악이 있고, 또 하나는 구한말 수입되어 백여 년 간 이 땅에 뿌리내린 서양음악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오랜 기간 동안 갈등과 긴장관계가 지속되었고, 이러한 관계는 화해와 융합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요즈음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이라는 양면적 음악문화 사이의 갈등은 본래 서양문화의 사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양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겪는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한국도 이런 나라들에 속합니다.

 

위와 같은 문화적 충돌이 없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서양문화라는 단일문화권에 속한 구미(歐美)의 여러 나라들에는 이러한 문화적 충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같은 아시아 제국 중에서도 서양문화의 유입이 있으되 독자적인 전통음악 문화의 영향이 아주 강한 회교권의 여러 나라들이나 인도, 중국 등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두 음악 문화 간의 충돌이 갈등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본래 자국(自國)의 문화유산 없이 서양문화가 수입되어 자국문화화되어 버린 나라들에도 이런 현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국의 전통적인 문화유산 없이 오늘날까지 역사를 이어온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한국은 위의 세 부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한국은 서양에 속하지 않으며, 수입된 서양음악 문화의 영향력은 아주 강한 반면 전통음악 문화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못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전통음악 문화의 질은 아주 훌륭합니다. 따라서 한국에는 전통음악 문화와 수입된 서양음악 문화 사이에 충돌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2.  근대음악 문화적 입장에서 본 한국의 기독교

 

한국사회에서는 위와 같이 서로 다른 음악 문화 사이의 충돌과 갈등이 있었지만 한국의 기독교 안에서는 최근까지만 해도 이런 현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안에는 지금까지 하나의 음악만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서양에서 수입될 때 가지고 들어온 서양음악 문화는 최근까지도 기독교의 유일한 음악문화였습니다. 지금까지의 한국 기독교란 마치 서양문화라는 단일 문화권에 속한 구미(歐美)의 여러 나라들과 같았으며, 또한 본래 자국(自國)의 문화유산 없이 서양문화가 수입되어 자국문화화되어 버린 나라들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 안에서는 문화적 충돌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문화적 식민지와 같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한국 기독교 안에서도 전통음악 문화에 대한 자각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서양문화의 토양 안에 안주하려고 하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건축, 예배 언어, 예복, 음악 등 어디에도 기독교가 한국 전통문화를 포용하고 있지 않다는 데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전통문화에 대한 자각이 커짐과 동시에, 기독교 안에서는 서양문화와 전통문화 사이의 충돌과 갈등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3.  비서양문화화론(非西洋文化化論)

 

위와 같은 문화적 충돌을 해소하기 위하여 우리는 비서양문화화라는 과제를 풀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인들은 서양문화에 안주해 버린 기독교를 아무런 감각 없이 받아들여 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서양적 기독교를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거나, 그것이 보편적인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겠느냐라는 주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음악 문화의 한국화 작업이 마치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인 양 이에 대하여 근심과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가 본래 서양에서 탄생한 종교가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하며, 그것은 팔레스타인 문화권에서 출발하여 전파되는 곳곳마다의 여러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기독교 문화란 프랑스와 미국을 거치는 동안 그들의 문화와 이데올로기에 동화된 서양 기독교 문화이지 예수님과 사도들 당시의 본래적인 초기 기독교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 하나의 예로 우리가 볼 수 있고 상상하는 블론드 색의 긴 머리와 파란 눈을 가지고 지긋하게 나이를 잡수신 분 같은 예수님의 그림은 팔레스타인 출신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유럽 사람들의 자기 식대로의 상상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시아 사람이지 유럽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백인들이 자기들 식대로 그렸다고 해서 예수님의 본질 자체가 왜곡된 것은 아닙니다. 그 그림이란 유럽인들, 즉 백인들이 자기식대로 표현한 문화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할 수 없는’ 복음과 ‘변해야 할’ 문화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하며, 우리가 받아들인 서양의 기독교는 서양문화라는 옷을 벗어 버릴 때 그 본질적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비신화화론(非神話化論)은 여기에 대한 좋은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준다고 봅니다. 즉, 불트만의 주장은, 우리가 가진 신약성서는 그것이 쓰여질 당시의 중동지방의 여러 가지 신화적인 요소를 반영하고 있는데 우리가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이와 같은 신화적인 요소들을 성서로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불트만의 이론을 가지고 복음, 즉 변할 수 없는 계시의 복음을 논하려 할 때에는 상당히 복잡한 신학적인 문제들이 야기되며 보수적인 신앙인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론이 됩니다. 그러나 문화, 즉 변해야 할 복음에 대한 응답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이 불트만의 이론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이때 우리는 비신화화가 아닌 비문화화, 즉 비서양문화화를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즉, 한국 기독교가 입고 있는 서양문화라는 옷을 벗김으로써 기독교의 본질적인 면을 보아야 하며 여기에 한국문화라는 우리 식의 옷을 입혀야 할 것입니다.

 

 

 

4.  문화적 공존(共存)을 위한 노력

 

이렇게 비서양문화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전통음악 문화와 서양음악 문화 사이의 공존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내의 서양음악 절대자들은 한국음악의 공존(共存) 문제가 곧 서양음악의 기득권 침해 문제로 연결시킵니다. 이것은 마치 흑인과의 공존 문제가 백인들의 기득권 침해 문제로 인식되어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근까지의 정치 현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내세우는 공존의 문제를 지배자들도 같이 공존의 문제로 이해할 때 거기에 평화가 있고, 둘 다 살아 남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서양음악과 더불어 한국음악을 공존적(共存的) 차원에서 수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한국교회 음악 문화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며 서양음악에 대한 주체적 자기 수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미 자기 음악 문화에 대한 기반이 튼튼한 서양교회들은 이러한 외래문화의 주체적 자기 수용에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1990년에 개편된 미국 찬송가 346장에는 우리 민요 ‘아리랑’의 곡조가 들어 있으며, 이제 동·서독 통일을 기념하여 나오는 독일 통일찬송가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 문화권의 찬송가들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우선적 과제는 이러한 서양교회의 외래문화 수용을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전 단계인 자기 문화 기반 다지기에 힘써야 합니다. 자기의 것이 없이 타인의 것을 받아들일 때 ‘주체적 수용’ 대신 ‘문화적 사대(事大)’만이 남게 됩니다. ‘아리랑’이 한국교회에서는 배척을 받고 서양교회에서는 환영을 받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고 한국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우리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아리랑을 속된 음악이라 하여 배척하는 한국교회가 그보다 더 속된 음악이었던 서양의 민요들을 가사만 바꾸어 은혜스럽다고 부르는 현실은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아리랑을 찬송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현행 한국 찬송가 중에 우리가 찬송가로 인정할 수 없는 곡이 수십 곡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내가 말하는 바는 당장 아리랑을 찬송가 곡조로 부르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아리랑도 못 부르면서 어떻게 남의 나라 민요나 국가(國歌)들은 비판 없이 예배 시간에 부르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문화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 행하는 ‘문화적 사대(事大)’ 현상인 것입니다.

 

5.  맺는 말

 

음악문화는 복음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한국교회나 다른 나라의 교회들이 어떤 음악문화를 만들어 가느냐 하는 작업은 모두 하나의 복음에 대한 각기 다른 문화의 응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가 알고 있는 문화적 방식대로 응답한다고 해서 복음이 변질되는 일은 없습니다. 서양식은 맞고 한국식은 틀리다는 생각은 곤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안에서 아직도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이 공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교회가 19세기 말의 문화적 상황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문화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가 그대로 있으며 전통음악이나 악기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비신앙적인 일로 우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아직도 ‘국악’을 기생음악, 술집음악, 유흥음악 정도로 생각하여 천시하고 비웃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전통음악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과 배타적 태도로 일관해 오고 있는 동안 교회 밖에서는 전통음악이 민족의 음악으로 새롭게 태어나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것을 사랑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 간직하고 보존,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토끼처럼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우리 사회는 거북이처럼 천천히 민족문화의 진정한 가치가 숨겨진 그 결승점에 서서히 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이 사회를 비교해 볼 때 교회는 사막 속의 오아시스가 아니라 전통문화적 관점에서는 오히려 오아시스 속의 사막처럼 고립되어 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최근 들어 기독교인 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입니까? 이것은 민족의 정서와 유리된 채 서양문화만을 감싸고도는 기독교가 더 이상 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귀중한 교훈입니다.

 

종교란 사회와 유리되어 존재할 수 없고 더구나 기독교는 사회 안에서 언제나 제 몫을 담당해야 생존할 수 있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전통문화에 대한 이러한 교회 밖의 인식 변화에 대해 더 이상 무감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이제라도 무관심의 잠에서 깨어나 전통음악을 민족의 음악으로, 나아가서 교회의 음악으로 수용함으로 사회로부터의 문화적 고립을 면해야 할 것입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