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 묵상

백 배의 결실을 얻은 이삭 그리고 세 개의 우물

코이네 2016. 1. 27.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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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6장 백배의 결실을 한 이삭과 세 개의 우물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창26:12~13)

 

저는 이삭이 참 좋습니다. 특히 그가 거부가 되었다는 이 표현이 너무 좋습니다. 이삭이 농사를 지었더니 백배의 결실을 하였고,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그가 거부가 되었다.. 저도 좀 그렇게 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거부'가 된 이삭, 그 말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이삭은 목축업이 가업입니다. 그런데 그가 낯선 땅으로 이주해서 거기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국 땅에서 평소 하지 않았던 농사를 지었다.. 이 부분에서 그가 얼마나 고생하며 또 열심히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열심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그래서 그가 백배의 결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잠10:l6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그렇게 결실한 이삭이 거부가 된 또 다른 비결이 그가 판 우물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자가 되자 그 땅의 왕이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다 막아버리고 그를 내쫓아버립니다. 죽을 고생해서 겨우 땅을 개간해 놓았더니 그것을 힘으로 빼앗아 버리고, 그는 쫓겨나 그랄 골짜기에 다시 터전을 잡습니다. 하루 아침에 거지꼴이 되어 쫓겨난 것입니다. 울화통이 터질만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거기서 다시 우물을 파고 열심히 땅을 개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우물을 하나 주셨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천신만고 끝에 새롭게 얻은 우물, 그런데 이 우물도 다시 빼앗겨버립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 와서 이건 우리 거라며 빼앗아 버린 것이죠. 어떤 분들은 이삭이 마음이 좋아서 빼앗으니 그저 주었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우물 이름을 보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름이 '에섹'입니다. 다투었다는 것이죠. 주기 싫어서 안된다고 저항했지만 불가항력적으로 뺏긴 것입니다. 우물을 뺏겨버린 이삭. 겨우 입에 풀칠 하나 했는데 다시 주저앉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여기서 주저앉지 않습니다. 다시 우물을 팝니다. 그랫더니 또 땅에서 물이 솟아오릅니다. 그는 새로운 우물을 얻었습니다. 그러자 그 지역 사람들이 다시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것도 빼앗아 버립니다. 이번에는 이삭이 이전보다 더 극렬하게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힘이 부치니 빼앗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물 이름이 '싯나'입니다. 대적했다는 뜻입니다. 다툰 정도가 아니라 대적했지만 뺏겼다는 것입니다. 그 허탈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삭은 다시 우물을 팝니다. 그의 끈기는 정말 대단합니다.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 좌절하고 절망한 상황에서 다시 일어서는 인내의 사람. 불평하고 절망해야 할 때 그는 이것을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삼았고, 변함없이 그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이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로 만든 사람, 그가 바로 이삭입니다.

 

 

 

그는 마침내 새로운 우물을 또 얻었습니다. 그가 세번째 우물을 파자 그 지역 사람들이 더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양심의 가책도 있었겠고, 또 이삭에게서 아주 특별한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사람은 건들면 안되겠구나.. 그런 경외심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삭의 태도입니다. 이렇게 우물을 얻자 그는 그 우물을 모든 사람에게 개방합니다. 이 우물은 우리가 먹기에 풍족하니 당신들도 함께 먹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우물 이름이 '르호봇'입니다. 넓다는 것이죠. 이삭의 마음이 그렇게 넓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거부가 된 진정한 비결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이 복을 바라지만 정작 하나님이 복을 주셨을 때 이를 복되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이렇게 복이 복되게 한 사람이며, 그 복을 더욱 넓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부가 된 것이죠.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