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창42;18] 다시 착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코이네 2017. 6. 26.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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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본문 : 창세기 4218-25

2017.6.25.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옛날 군대 참 배가 고팠습니다. 한 일병이 너무나 배가 고파서 보초를 서다가 담을 뛰어 넘아 군대 매점 PX에 훔쳐 먹으로 들어갔습니다. 초고파이, , 초콜릿을 실컷 먹고 호주머니에 가득 넣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나오다가 얼마나 재수가 없었는지 사단장과 맞닥뜨렸습니다. 당황한 일병은 머리가 참 영리했나 봅니다. 사단장에게 인사했습니다. “충성, 사단장님 저를 아시겠습니까?” 내가 많은 병사들 중에 너를 어떻게 알아 임마. 이 자식 바라 일병놈이 어디서 도둑질이야? 너는 영창이다 마, 일병은 다시 인사했습니다. “사단장님 저를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그래 모른다.” 그러자 일병은 그대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아직도 못 잡았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린 지 7년이 넘었습니다. 꿈을 해석한 대로 7년까지는 풍년이었고, 이제 가뭄이 시작됩니다. 가뭄으로 농사가 되지 않고, 온 세상이 기근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건 야곱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같아서는 예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특별히 사랑하시니 다른 곳은 가뭄에 시달려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그런 어려움이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른 곳은 비가 오지 않아도 야곱이 사는 동네만은 비가 오고 그러면 사람들이 ,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뭔가 다르구나그러면서 모두 하나님 믿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야곱의 입장에서도 남들이 겪어야 할 시련, 고난 이런 거 다 똑같이 격어야 한다면 굳이 하나님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같이 그런 어려움을 똑같이 겪어야 할 것 같으면 하나님 믿는 보람이 없잖습니까? 그런데 야곱과 그 가족들 모두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가뭄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야곱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야곱과 그 아들들은 우리가 억울하다 하는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니 우리만 어떤 특혜를 입을 것이다 그런 생각 자체가 없습니다. 그냥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양식이 떨어지자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오게 합니다. 아버지의 명을 따라 야곱의 아들들은 막내 베냐민만을 아버지 곁에 두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일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요셉을 봐도 그가 동생인 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의 형들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 형들을 어떻게 할까? 요셉은 형들을 모두 간첩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당연히 형들은 자신들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열심히 항변했고, 그 결과 형제들 중 시므온만 감옥에 둔 채 모두 석방시켜줍니다. 그리고 다음에 올 때 동생 베냐민도 함께 데리고 와야 시므온을 풀어줄 것이라 말합니다. 이렇게 풀려난 형제들은 준비해간 돈으로 곡식을 샀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 이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주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 눈여겨 봐야할 부분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형들을 본 요셉, 그가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형들을 보았을 때 요셉은 이전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며, 아픈 기억들이 상처가 되어 끓어오르는 분노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보자 원한, 복수, 분노 이런 것이 아니라 꿈이 생각났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꿈, 자신의 볏단이 가운데 서고, 형들의 볏단이 둘러서서 그에게 절을 한 꿈, 그리고 그 다음에는 형제들의 별뿐 아니라 해와 달까지 자신을 향해 절을 하던 꿈. 그 땐 철없이 그 꿈을 동네방네 떠들며 다니다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 험난한 인생을 살게 되었는데.. 아마 요셉은 싱긋이 웃었을 것입니다. 아 이거구나.. 하나님이 주신 꿈이 바로 이것이구나. 저들이 곡식을 사러 나에게 와서 이렇게 엎드려 절하는 것, 이건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나의 형제들을 구원하시려고 날 이 고생 시킨 것이구나. 하나님이 주신 꿈, 그건 나를 출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를 통해 내 가족, 내 아버지의 집을 살리려고 그러셨던 것이구나.

처음 꿈을 꾸었을 때는 그게 뭔가 싶었는데, 때가 되니 하나님이 주신 꿈이 선명하게 이해가 되는 것이죠. 꿈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을 때 요셉은 자기의 분노와 증오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가족을 살리기로 결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둘째, 바로 죄책감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에 의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자신들을 가둔 사람, 곡식을 사기 위해 머리를 조아려야 했고, 자신들의 무고함을 말하며 살려달라 애원한 사람이 자신들이 죽이고자 했던 그 동생 요셉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옥에 갇히게 되자 그들이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바로 그 동생 요셉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예전에 죄없는 동생에게 그렇게 모질게 대했고, 죽게 했더니 그 피 값이 우리에게 돌아오는구나 하며 탄식합니다. 그들의 이런 말은 그동안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동생을 해꼬지한 죄책감에 시달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는 창도 뚫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그 일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고, 자신이 저지른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을까 싶은 불안이 엄습해옵니다. 그리고 내가 나쁜 짓을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겠지 싶지만 이 죄책감은 마음 깊숙이 뿌리를 박고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서는 그 인생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 때부터 죄책감이 그 인생의 주인노릇을 하기 시작합니다.

 

죄책감은 무엇일까요?

 

사실 사람이 죄를 저지른 후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죄책감이 들 때 우리는 내가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했다는 후회와 함께 양심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죄로 인한 아픔이 느껴지면서 다시 그러지 않아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카네기 멜론 대학교 연구진은 죄책감에 대한 하나의 실험을 했습니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 느끼는 죄책감의 정도를 측정하도록 해 죄책감 척도를 작성한 결과 죄책감을 잘 느끼는 사람일수록 믿음직스러울 뿐 아니라 공감 능력이 있고, 다른 사람의 관점을 잘 이해하며, 행동에 따르는 결과를 고려하는 능력이 뛰어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죄책감을 잘 느끼는 사람은 업무에서도 거짓말이나 속임수 같은 비윤리적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적고, 회사에서 지각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드물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죄책감을 해결하지 못하면, 이것은 도리어 마음을 헤치게 되며, 이상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죄책감은 사람의 생기를 앗아가며, 생명력을 파괴시키고, 사랑을 상실하게 합니다. 죄책감을 마음에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욱 내면으로 깊이 껴안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런 죄책감으로 인해 생명과 사랑이 고갈되고, 인생의 꿈 전체에 독이 퍼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죄책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건강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열어 가야할 모든 에너지를 빼앗아버릴 정도입니다. 마침내는 기진맥진해서 쓰러져버립니다. 마침내 진정한 사랑이나 참 자유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 나아가 해결하지 못한 죄책감은 신앙마저 흔들게 됩니다. 자신의 구원마저 의심하게 합니다. 이런 죄책감은 하나님 곁으로 인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피해 멀리 떠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 인간의 용서를 수용할 수 없게 됩니다.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긴장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큰 불행으로 자신을 몰고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지옥이 펼쳐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인 바로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두둔하는 것입니다. 그게 안 되면 회피합니다. 억지로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심지어 남에게 뒤집어 씌워서 그 죄의 올가미에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어떤 경우는 다른 보상으로 만회하려고 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행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한 선행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행위들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하는 것입니다.

 

매일 집안을 어지럽히기만 하는 개구쟁이 아들에게 엄마가 착한 어린이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엄마가 잘 아는 어떤 착한 어린이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기가 알아서 이도 닦고, 세수도 하고, 장난감도 가지런히 정돈한대똘망똘망한 눈으로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슬픈 표정으로 지으며 울먹이며 말합니다. “엄마 그 애는 엄마가 없대?”

 

요셉의 형들은 그 미운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부터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감옥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제일 먼저 요셉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옛날에 우리 동생에게 하지 않아야 할 짓을 해서 지금 그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자책합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요셉에게 저지른 그 일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왔지만 이 죄책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 죄책감이 주는 고통 속에 허덕이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제가 설교 시작 때 머리좋은 일병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단장님이 절 모르신다면 전 도망가겠습니다 하고는 도망가버렸습니다. 사단장 앞에서는 달아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죄책감 앞에서는 도망갈 길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을 좇는 아이란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좀 낯선 이란이라는 나라의 소설입니다. 그 내용에 보면 자기 친구가 성추행당하는 장면을 목격했지만 무서워 그 친구를 도와주지 못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평생을 그 죄책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그 친구를 보는 것이 미안하고 무서워 피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비겁한 모습이 밝혀질까 두려워 그 친구를 미워하게 되고, 나중에는 모함을 해 그 마을에서 떠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 아이 생각에 이 친구가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이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줄 알았던 것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 아이는 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고, 그 때문에 더 나쁜 짓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나날이 악해져 가던 아이가 어느 날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한 지혜로운 사람이 그에게 전해준 한 마디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착한 사람이 될 방법이 있다 There is a way to bo good again."

이 말은 친구의 모함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아이가 그래도 그 친구를 사랑하고 걱정해서 그 친구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말이었습니다. ‘다시 착한 사람이 될 방법이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다시 착한 사람으로 돌아가려는 의지.. 우리가 죄책감에 빠질 때 마귀는 아주 강압적인 태도로 우리를 정죄합니다. ‘넌 죄인이다. 넌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도 너를 버렸다.넌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하지만 이건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요일1:9~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친구가 범죄하면 일흔번에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용서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뻔뻔하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께로 가서 이실직고 해야 합니다. “제가 이런 죄를 저질렀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 용서가 우리를 과도한 죄책감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밧줄이 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리고 난 뒤 그저 후회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했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 우리가 우리 형제를 팔았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옵소서. 그리고 그 형제를 보살펴주옵소서." 그저 몇 마디의 말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를 하였다면 그들은 요셉을 만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을 만나 무릎꿇고 자신들의 잘못을 빌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요셉이 꾼 꿈, 형들의 볏단이 자신을 향해 절을 하는 건 단지 곡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용서를 구하기 위한 무릎 꿇음, 이를 통해 서로 화해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을까요? 그랬다면 형들과 요셉의 첫 만남은 새롭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착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성령이 하시는 그 음성에 늘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