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 교육

우리나라 해방 이전의 교회학교

코이네 2017. 9. 13.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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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전의 교회학교

 

영국에서 시작된 주일학교 운동이 미국으로 건너가 큰 발전을 보게 된 후 드디어는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주일학교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선교사들에 의해서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버림받고, 고통받는 자, 가장 비천한 이들과 함께 숙식을 같이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이런 이들에게 감명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침내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자신들도 이 땅의 동족을 위해 헌신하는 결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1887년 정식으로 학교와 병원이 국왕의 승인을 받게 되자 이들은 본격적으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주일학교를 남여 별로 갖기 시작하였다. 역사적으로 1888115일에 서울 정도 이화학당에서 처음 어린이 12명과 부인 3명이 모여서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일학교 탄생의 기록이다. 물론 이 때에 분반 공부 형식이 아니라 통반으로 하여 한 교사가 공부를 시켰다.

 

그리고 그 이전 18822월에는 스크랜톤 부인이 주일날 밤마다 여자를 위하여 성경공부를 시작하여 믿게 된 이가 많아졌다. 그리고 1888년 여름에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각 곳에 전도를 나아가 자기네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쳤으므로 많은 신자가 생기게 되었다. 189418일에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서 22명의 학생으로 학습반을 조직하여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가르쳤다. 이 때 각처에서 학습반이 유행되었다. 1897년에는 평양의 6개처에서 주일학교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주일학교가 발전되기 시작하자 경향 각지에 이 운동이 퍼지게 되었다.

 

도시 교회들은 분반공부 제도를 사용해보고자 하였지만 교사들이 없으므로 교사를 양성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900년에 이르러 평양 남산재 교회에서 노블 선교사 부인이 사범반을 두고 주교교사 양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약 2,3년간 교육을 받은 후에 유년 주일학교가 시작되었는데 그 해가 1903년이었다. 아마 이때부터 5-15세까지의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유년 주일학교가 활발하게 운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평양에서 유년부를 따로 지도하는 운동이 시작되자 전국에 차츰 파급되어 1908년에 서울에서도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장년 주일학교가 이때부터 명칭을 따로 부르게 된 것은 틀림없는 일일 것이다. 이 때에 사용한 주일공과는 통일공과였다고 한다.

 

그 동안 교회수는 나날이 늘어났고 곳곳에서 교회마다 독자적인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있었으나 아무런 협의체나 연합체가 없었다. 1905년에 이르러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선교 연합 공의회내에 주일학교 공의회가 조직되었다. 이것이 조직적인 주일학교 운동의 첫 해가 된 것이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주일학교 교육을 주로 하는 각 선교회의 선교사간의 친목과 주일학교 교육을 위한 교재로서 통일공과를 편집하는 일이었다. 그 때 그들이 편집한 교재는 주일학교 공부라는 책이었다. 선교사만으로 조직되었던 위원회가 6년 후 1911년에 이르러서는 우리 나라 사람들도 함께 위원이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주일학교 운동이 발전하기 시작할 때 이를 돕기 위하여 19084월에는 세계 주일학교 연합회 실행부장 하인즈 등 제8회 세계 주일학교 대회를 전후하여 세계 각국 대표들이 7차에 걸쳐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주일학교 사업에 커다란 자극과 격려가 되었다. 이 결과 1921년에 새로운 역사와 창조를 이룩하는 전국 주일학교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1928년 제10회 세계 주일학교 대회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렸을 때 한국 주일학교 대표가 참석하여 보고 한 것을 보면 1884년 선교사업이 활발하게 시작한 이래 불과 44년 밖에 안된 짧은 역사 가운데서 어떤 피선교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약적인 발전이 있어, 주교생이 26만명이 되었다는 보고로 세계 모든 나라 대표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렇게 파급된 주일학교교육은 1907년 대부흥의 영향을 직접적, 간접적으로 받아 발전하였으며, 날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주일학교 운동이 개 교회적으로 교단적으로 그리고 연합적으로 활발하게 발전되다가 19386월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여기서 연합사업이 종지부를 찍었으나 교단별로 교육사업은 명목이나마 유지하고 있었다. 각 교단별로 주일학교 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교파별

연도별

주일학교수

학생수

교사수

장로회

 

1930

4,360

232,185

20,613

1931

4,520

267,736

25,393

1932

4,858

344,915

26,493

1933

3,143

286,921

26,613

1934

3,198

293,810

26,810

감리회

1930

609

16,644

3,664

1931

590

47,330

3,530

1932

574

49,330

3,530

1933

581

50,308

3,863

1934

561

50,046

3,800

 

주일학교가 발전됨에 따라 교재가 필요하게 되어 매월 월간지로 공과를 만들었으나 만족할 수가 없어서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선교회 공회에서 만국주일공과를 발행하게 되었고, 1913년에 유년부 공과가 계단으로 발간되는 한편, 각 부의 계단공과도 편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계단공과는 유감스럽게도 1년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는 통일성경 보통공과라는 책이 토마랜과 배유지 선교사의 집필로 나왔고, 이 때에는 만국통일 유년공과도 출판하여 1940년까지 계속하여 나오게 되었다. 1921년부터는 만국통일공과를 출판하여 1940년까지 사용하였다. 그동안 주일학교 교육을 위한 잡지도 발간되었다. 이것이 곧 주일학교이다. 19201월에 교회학교 교사라는 잡지를 내어 계단공과에 맞는 학생공과도 게재하였다. 이 잡지는 193010월까지 계속되었다. 192111월에는 주일학교 신보를 주일학교 연합회에서 발행하여 193112월까지 간행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의 교회학교의 모습은 첫째 무엇보다도 먼저 서구 문명을 갈구하는 한국인들에게 서구 종교를 설득력 있게 소개하였고, 둘째, 성경을 한글로 번역되어 평민과 부녀자들이 성경을 읽으므로 성경연구가 대중화되는 교육의 방법이 되었다. 셋째 성경공부를 통해서 한국인의 정치 사회적 현실이 성경 현실과 일체감을 느끼면서, 민족의 해방에 대한 생각을 일깨웠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 교육이 민족의 정치 사회적 참여를 일깨울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지만, 1919년 삼일운동 이후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일제의 탄압 아래서 이 민족이 울분에 빠져 있을 때 교회는 교육 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좌절을 달래고 민족의식을 깨우쳐 갔던 것이다.

 

* 이 글은 제 석사학위 논문 '교회학교 교사의 지도력개발에 관한 연구' 중 일부입니다.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