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 칼럼

용서받지 못한 자, 용서를 빌어야 용서받는다

코이네 2017. 11. 8.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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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자

 

지난달 칼럼에서 ‘용서한다는 것’에 대해 글을 썼다. 용서는 죄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해를 당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용서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결론적으로 나는 용서해서 용서한 사람이 됐지만, 그 사람은 자신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한 자로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피해를 당한 내가 용서를 했으니 잘못을 저지른 그 사람 죄는 자연히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겠지만 그런 게 아니다.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다 보니 피해를 당한 사람이 설령 용서해줬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고, 당사자 입으로 용서한다는 말을 직접 듣지 못했으니 용서받은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죄는 죄를 지은 자에게 남아 있는 것이고, 용서받지 못한 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저지른 범죄와 잘못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히거나 용서되는 게 아니다. 도리어 쓴 뿌리를 품고 나도 모르는 새 더 크게 죄를 키우며, 죄가 갖는 비참하고 혹독한 불행으로 이끌어간다. 죄인 마음에는 평안이 없다. 언제나 그 죄로 인한 처벌을 두려워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우리는 흔히 죄지은 사람이 도리어 더 잘 산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게 보일 뿐이지 죄가 주는 지옥이 그 삶 밑바닥에 끓고 있는 것이다.


살인미수로 15년 동안 도피생활하다 공소시효 2달을 남겨두고 체포된 사람이 있었다. 그가 경찰에 체포됐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범행을 저지르고 나서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다. 도피생활에 지쳤고 이젠 마음이 홀가분하다”


용서도 적극적으로 ‘내가 용서한다’고 해야 용서가 되는 것이듯, 용서를 받으려면 자신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해달라고 제대로 용서를 빌어야 용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첫째, 진정 뉘우치는 마음으로 용서를 구해야지 요구해서는 안 된다. 내가 할 일은 용서를 비는 것이다. 용서를 해주든 안 해주든 그건 피해자 몫이다. 내가 용서를 구했으니 당연히 용서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용서를 빌 기본자세가 돼 있지 않은 것이다.


둘째,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분명히 하고, 용서를 청해야 한다. “만약 내가 잘못했으면 용서해 줘” 또는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당신에게 저지른 죄는 해서는 안 될 짓이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용서를 받으려면 뉘우침에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진정성이 느껴지는 용서를 빌어야 용서가 되는 것이다.


가난한 가정에 시집와서 오랫동안 모진 시집살이를 겪으며, 갖은 고생을 다 한 끝에 이젠 제법 삶의 여유를 찾은 교회 집사가 있었다. 어느 날 시골에서 시어머니가 또 찾아왔다. 지난날 그리도 당당하던 어머니, 세상 어머니들이 다 그렇듯 자기 아들만 최고라고 생각하며 며느리쯤은 우습게 여겼던 그 어머니께서 아들도 함께 있는 자리에서 며느리에게 뜻밖의 말은 한다.


“얘야! 너에게 내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갈 것 같아 고백한다. 내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 네게 거짓말도 하고 못 할 짓도 많이 했구나.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보니 내 잘못을 알겠다. 나를 용서해라”


그러면서 며느리 두 손을 꼭 잡는 것이다. 시집온 후 처음으로 들어보는 어머니 진솔한 고백에 며느리는 깜짝 놀랐다. 순간 오랜 앙금으로 가라앉아 있던 서운함이 일순간에 사르르 녹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껴안았고, 둘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해 보라. “용서합니다” 또 그렇게 말해보라. 용서하는 것, 서로를 살리는 최선의 길이다.

 

(이 글은 2017.11. 양산시민신문 http://ysnews.co.kr/ 에 기고한 글입니다. )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