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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아브라함의 갈등 해결 방법 _박동진 목사

코이네 2021. 10. 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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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게 갈등을 해결한 아브라함

읽을 말씀 : 창세기 131~13

외울 말씀 :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3:8-9)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조가 되는 분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준 분이기도 합니다. 우리 믿음의 일꾼들이 아브라함에게 꼭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갈등을 해결하는 지혜입니다. 교회에는 크고 작은 갈등이 있습니다. 이것을 지혜롭게 잘 해결해야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4: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1. 아브라함과 조카 롯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가라 명하신 가나안땅으로 이주했습니다. 이 때 그의 조카인 롯도 함께 데려왔습니다. 어린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롯도 가정을 이루고 또 소유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한 집에 두 가정이 함께 하다 보니 자연 크고 작은 분쟁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목축을 주업으로 하였습니다. 두 가정이 키우는 가축들은 많고 그들이 거하는 땅은 좁다보니 서로 꼴과 물을 먼저 먹이기 위해 경쟁을 하다 보니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고 자칫하면 아브라함과 롯이 크게 다투게 될 판이었습니다.

 

2. 분쟁을 대하는 아브라함과 롯의 태도

 

아브라함과 롯이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갈등이 빚어졌을 때 이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너무 다릅니다. 먼저 롯은 일어난 상황을 알면서도 수습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조카인 롯이 삼촌을 찾아와 문제 해결을 위해 먼저 노력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어찌된 셈인지 롯은 가만히 있습니다. 내 문제가 아니라는 듯 강 건너 불구경합니다.

어떤 경우는 이렇게 관망하다보면 문제가 해결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해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지혜롭게 잘 판단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먼저 나섭니다. 초기에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머물고 있던 곳에 아브라함과 롯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집안인 삼촌과 조카가 서로 싸운다면 그들에게 대한 평판은 급속도로 나빠질 뿐만 아니라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이들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한 것입니다.

 

13: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3. 아브라함이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

 

1) 아브라함은 친히 조카를 찾아갑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가족보다 힘과 재력이 더 큽니다. 이런 경우라면 힘으로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른의 권위를 내세워 조카를 불러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카를 꾸짖는다면 삼촌의 권위도 설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조카 롯에게 찾아갑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겸손한 태도가 문제 해결을 수월하게 하는 것입니다.

 

2) 애정 어린 마음으로 설득합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찾아갈 때 적대시 하지 않습니다. 상황은 자존심도 상하고 그래서 화도 날 법 한데 그러지 않고 조카에게 다정한 말로 권면합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3)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합니다.

문제를 해결할 때는 먼저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먼저 파악해야 구체적인 해결방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이런 갈등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까?

 

13:5~6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지금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비좁기 때문입니다. 땅이 넉넉하고 가축들을 키울 물과 꼴이 풍부하다면 일어나지 않을 문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갈등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에 대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나를 떠나가라

 

그래서 롯에게 말합니다. “나를 떠나가라이 말을 할 때 아브라함은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아들이 없는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아들처럼 키웠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롯의 보호자였는데, 어느 날 보니 조카가 훌쩍 커버렸습니다. 어른이 된 것이죠. 이 사실을 인정하는게 사실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눈에는 어른 롯이 아니라 아직도 자신의 손을 잡고 따라다니던 그 어린 조카였을테니까 말이죠. 하지만 이제는 내 품을 벗어나 자신의 일가를 세울 한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기에 떠나보내야 할 때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말합니다. “나를 떠나가라.” 이제는 네가 나를 떠나 독립할 때가 되었으니 보내야겠다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5)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당시 아브라함처럼 목축을 하는 사람들은 꼴을 먹일 수 있는 곳으로 늘 이동하며 다녀야했습니다. 집을 지어서 정착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장막을 가지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지역에 대한 정보가 아주 중요하며, 좋은 자리를 먼저 선점하는 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말합니다.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우리가 살아갈 땅은 참 넓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줍니다. 그러니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양보합니다. 네가 먼저 떠나가라 나는 네가 가는 곳으로 가지 않고 딴 곳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통 큰 양보입니다. 그러자 롯은 눈을 들어 사방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이런 모습을 본 아브라함은 아마 많이 서운하고 또 씁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롯은 요단지역에 있는 소돔과 고모라 땅을 향해 떠납니다. 정말 냉정하게 떠납니다. 롯이 떠난 소돔과 고모라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갈등은 이렇게 해결되었습니다. 서로 윈윈하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4.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에필로그(후일담)이 있습니다.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13:15~1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은 얻은 것 없이 모두 양보해버린 바보 같습니다. 조카만 좋을 일을 시킨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에게 찾아와 조카 롯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놀라운 약속을 하시고 또 복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 같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을 얻은 것입니다. 이렇게 갈등을 잘 해결하며 화평케 하는 주의 종에게 하나님은 더 큰 복으로 갚아줍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y 박동진 목사(소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