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의 행복
성경말씀 : 사사기 10장 1절 - 5절
2013.9.15. 소토교회 주일낮 예배 설교
1. 성경에는 참 많은 난제들이 있습니다.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참 난감한 경우를 만납니다. 그 중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한 몫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사들 중 돌라와 야일, 다른 사사들은 그들의 업적과 행적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 이 두 사람은 슬쩍 지나가는 듯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저 이런 사사들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이름만이라도 기록해두자는 것인지, 아니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사들도 있지만 그저 이렇게 이름만 남긴 사사들도 있으니, 그저 사사가 된 것에 만족하지 말고, 일 좀 제대로 하자는 뜻으로 후세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남긴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 짧은 내용 속에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뭔가 가르치고자 하는 주님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인지, 쉽게 판단하기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어려움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우린 지도자가 되면 뭔가 내세울만한 업적을 해놓아야 한다는 그런 압박감을 갖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가시적인 것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고,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들을 벌입니다. 그 중에는 필요한 것도 있지만 불필요한 것도 많습니다. 불필요한 줄 알면서도 또 합니다.
재임기간 동안 별 다른 일을 저지르지 않고, 조용히 자신이 할 일만 제대로 하고 나오는 사람을 보면 언뜻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잘했다고 해야할지, 못했다고 해야 할지. 그냥 그렇다고 해야 할지. 선뜻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런 부분이 나오면 당황스런 것입니다. 코미디 프로에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고객님 당황하셨지요?” 라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2. 돌라의 희생
일단 그런 당혹감을 느끼셨다면 그 당혹감을 조금만 뒤로 미루어두고, 성경을 차근히 곱씹으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돌라입니다. 돌라는 잇사갈 지파이며, 그 아버지는 부아입니다. 부아는 ‘입, 말’이란 듯이며, 돌라는 ‘곤충, 벌레’라는 뜻입니다. 사사의 이름이 벌레라니요? 조금 뉘앙스를 비꼬듯이 해서 부르면, 버러지 같은 사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이름만 보아도 사사 돌라는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위대하게 떠받들여지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돌라의 아버지 부아는 역대기의 기록을 보면 그는 전사였습니다. 그렇기에 돌라 역시 전쟁에 능한 전사의 기질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비멜렉 이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였고. 23년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잇사갈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활동한 주 무대는 에브라임지파가 살고 있는 산간지역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을 등지고, 타지에서 사사로 활동한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상상력을 동원해보면, 우리는 사사 돌라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사사가 된 때는 바로 아비멜렉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큰 혼란에 빠져 있을 때입니다. 세겜사람 아비멜렉이 그 형제 70명을 공개처형하고, 또 그것도 모자라 자기 고향인 세겜 사람들과 전쟁을 벌여 무려 수천명이 죽임을 당한 후였습니다. 여러분, 전쟁 중에도 가장 치유되기 어려운 전쟁의 상처가 바로 동족 간의 전쟁입니다. 우린 지금 625전쟁이 끝난 지 무려 60년이 지났는데도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원수처럼 대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들은 왕이 되고자 하는 아비멜렉 때문에 동족간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얼마나 많은 원망과 질시가 정국을 어지럽혔겠습니까? 그런데 돌라는 그런 정국 상황 속에서 23년을 사사로서 활동을 잘 하였다고 합니다.
즉 돌라는 외세의 침입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혁혁한 전공은 없지만 분열되고 상처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픔을 잘 치유하고, 그들 간에 화목을 이루며, 이스라엘 내부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전심을 다한 사사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고향에서가 아니라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 머물렀습니다. 세겜이 바로 에브라임 지파에 있었고, 동족간의 전쟁 역시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것이기에 돌라는 아예 그 지역에 머물면서 그 상처를 치유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돌라 사사가 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바로 떠오르는 대단한 사건은 없지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열의 현장에서 그들을 치유하고 평화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부부도 그러합니다. 금술 좋은 부부가 상처하면 재혼을 빨리합니다. 이유는 그 빈자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너무 친숙해서 그 빈자리를 잘 모르지만 없어지고 나면 다른 어떤 것으로 메울 수 없는 허전함 때문에 재혼을 서두른다고 합니다. 돌라가 바로 그런 사사였습니다. 평소에는 잘 있는지 없는지 그 존재감을 모르지만, 실은 그 헌신이 너무 커서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3. 야일과 서른명의 아들
그런데 이 돌라 사사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은 사사가 있습니다. 바로 야일입니다. 돌라는 분열된 이스라엘을 치유하기 위해 자기 고향도 떠나 눈에 보이지 않는 헌신으로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감수하며 헌신한 사사인 반면, 야일은 자기 고향에서 자기 가문의 부흥을 위해 힘쓴 사사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합니다. 그의 고향이 길르앗이며, 이 길르앗에서 사사가 되었다는 것과 그에게 아들이 30명이 있고, 그 아들들이 모두 나귀를 탔으며, 그 아들들이 한 성읍씩 맡아 다스렸다. 그리고 그 성읍들을 하봇야일이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부귀영화를 누린 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사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빌리그레함이라는 세계적인 부흥사가 있습니다. 예전 부산에서 복음화 대성회를 하는데, 빌리그레함의 아들이 초청강사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올 때 자기 전용기를 직접 몰고 왔습니다. 이를 두고 최홍준 목사는 감동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전혀 그 사실이 감동이 되질 않더군요. 그 전용기 다 교인들이 헌금한 것일텐데, 목사가 뭐가 그리 긴박한 일이 있어 전용기까지 구입하며 다녀야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돌라의 23년 이후 야일과 같이 나라가 부강하게 되었지만, 야일과 같은 지도자 다음엔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다시 우상을 섬기고 악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돌라와 야일의 차이이며,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사사 이야기를 함께 기록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4. 하나님의 바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누린 평화가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땐 다른 시대와 달리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나온 영화 중 ‘관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 대목에 보면 주인공이 자신은 파도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파도를 만드는 것은 바람인데, 바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안히 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근원은 하나님이 그런 바람을 일으킬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평안케 하시며 바람을 잠잠케 하시고, 이스라엘이 이렇게 부요함을 누리게 해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때 그들의 신앙을 다듬고 앞으로 더욱 전진하기 위해 준비를 잘 하라는 것입니다.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현실의 부요함과 안일함에 빠져 자신을 더욱 온전하게 다듬지 못했을 때 그들은 곧 세찬 풍랑과 맞딱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안타깝게도 그런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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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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