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마16장, 혹 당신도 가면을 쓰고 신앙인 연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코이네 2015. 4. 1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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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

본문: 마태복음 16:1-12 / 박동진 목사

 

1. 믿지 않으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들은 방금 예수님이 4천명을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신 것을 보고도 하늘로부터 오는 이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기준과 원하는 바와 다르다는 것이죠. 이렇게 믿지 않으려 작정한 이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음이 좀 상하셨던가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떡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말하자 그들은 두고 온 떡에 대해 논의하였고, 예수님은 이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어떻게 보면 서로 적입니다. 바리새인은 서민들의 신앙적지주였고, 사두개인은 제사장과 귀족들의 신앙을 대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한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신앙관을 갖고 있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신앙적 형식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주의 말 그대로 겉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속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종교인, 바로 그것이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두고 무덤이라며 심하게 질책합니다. 회칠한 무덤이란 유대인들의 전통에 유월절이 가까우면, 순례자들이 죽은 사람의 시체나, 뼈에 무의식적으로 접촉되는 일을 피하게 하기 위해 무덤에 회를 칠해서 눈에 잘 띄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시체로 인해 부정하게 되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죠. 회칠한 무덤이 겉보기에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냄새나는 썩은 시신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시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거룩하게 옳게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실제 그들의 속은 위선과 불법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비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자들에게 그 위험을 경고하시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형식주의의 위험

 

예수님은 왜 그리 형식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실까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1) 먼저 형식주의와 문자주의는 사람을 진실한 종교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위선자로 만들기 쉽습니다. 그리스말에 `위선자'라는 말은 광대라는 뜻이 있고, 광대는 연기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지면 신앙인처럼 보이는 연기를 하는 것이지, 참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연기에 빠지다 보면 정말 자신이 그럴듯한 신앙인처럼 생각이 드는 착각에 하나님도 속이고 자신도 속이게 됩니다.

 

2) 그리고 형식주의는 신앙의 본질보다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신앙의 핵심은 내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형식주의에 빠지면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기보다는 교리와 제도, 그리고 풍습과 전통 등 신앙의 외적인 형식을 더 사랑하게 만듭니다.

건전한 원칙, 신앙의 본질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를 밝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하지만 비본질적인 신앙의 형식에 얽매어 있게 되면 자기가 속해 있는 그룹에서는 헌신적이고, 그 그룹을 위해서는 순교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는 세상을 위해서는 매우 무관심하게 될 수 있습니다. 신앙심은 깊은 것 같은데, 그래서 교회에 대한 충성심은 높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주 무책임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죠. 이것은 종교적 이기주의입니다. 형식주의에 빠지면 이처럼 종교적 이기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3) 또한 형식주의는 죄인이 아닌 죄인을 많이 만들어 내게 됩니다. 자신들이 만든 신앙의 형식적 잣대로 다른 사람의 신앙을 규정하며, 정죄합니다.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 하다 보니,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틀렸다고 정죄합니다. 교회가 이런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면 교회 내에 위화감이 만연하게 되고, 분열의 길을 걷습니다.

 

4) 마지막으로 형식주의는 삶의 진정한 변화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저 외적으로 보이는 종교적 형식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가 문제이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참된 변화에 둔감하게 됩니다. 거기까지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죠.

 

4. 형식주의 극복

 

주님은 우리가 이런 형식주의적인 신앙관을 극복하길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1) 먼저 신앙의 본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말씀처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보다 하나님의 정의·자비·신의·사랑을 더 중요시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얼마나 교회생활에 충실했느냐를 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품이 변하고, 교회와 사회에 대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감과 책임 그리고 주님의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관을 갖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 공동체는 교회 내의 결속과 변화 그리고 부흥을 넘어서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으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내가 속한 교회 자체가 얼마나 알차게 성장하느냐를 넘어서 세상에 대해 예수님의 영향력을 제대로 미쳐고 있는지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중심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일이면 세월호 사건이 난 지 꼭 일년이 됩니다. 교회는 주님의 마음으로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아픔과 눈물 그 고통을 감싸주고, 마음을 위로하며, 눈물을 닦아줄 사명이 있습니다. 이건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어린 신앙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2) 또한 제도나 규정을 절대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제도나 규정에는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보완되어야 하고, 수정되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절대시 할 때 언제나 분열이 생기게 되고 생명력을 상실한 공동체가 됩니다.

 

원칙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에는 언제나 창조성이 요청되고, 매우 포용적이지만, 형식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매우 배타적입니다. 원칙을 중심할 때 갖게 되는 관심은 그 나라와 그 의이지만, 형식이 중심이 될 때에는 우리와 같지 않다며 늘 배척하고 또 그래서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버립니다. 형식이 중심이 되면 비신앙인들이 마귀의 자녀로 보이지만, 본질이 중심이 되면 우리와 함께 구원받아야 할 그래서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며 구원해야 할 포기할 수 없는 나의 형제로 보이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부단히 자기 갱신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살피며,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 될 때까지, 그래서 주님과 우리가 온전한 하나가 될 때까지 부단한 자기 갱신을 해가야 합니다. 죄인된 자신의 참모습을 직시하고, 늘 애통하며 회개하고, 성령 안에서 다듬어지고 훈련되어서 참 자유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형식주의에 안주해서 세상적인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참 인간이 되어 가는 것, 진리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