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창30:1] 내가 경쟁하여 이겼다

코이네 2016. 8. 20.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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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쟁하여 이겼다

본문 : 창 30:1-24

2016.8.7.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야곱이 한 주에 두 번의 결혼을 했습니다. 한 여인은 그가 사랑해서 7년을 수일같이 여기며 기다려왔던 라헬이고, 또 하나는 외삼촌의 음흉한 간계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결혼하여 인생을 책임지게 된 레아입니다. 레아와 라헬은 친 자매간이었는데, 이제는 야곱의 부인이 되어 야곱의 사랑을 차기하기 위한 숙적, 라이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둘 간의 경기는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야곱은 라헬과 참 죽이 잘 맞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라헬을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결혼한 후 레아는 본둥만둥 내버려두고 라헬만 찾아 사랑했습니다. 라헬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였고,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으며, 이로 언니인 레아가 얼마나 힘들어할 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섭니다. 레아에게 라헬이 없는 복을 주십니다. 차례로 네 명의 아들을 낳게 하십니다. 첫 아들을 르우벤이라 이름지었습니다. 보라 아들이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시므온, 하나님께서 나의 간구를 들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레위, 연합한다는 뜻인데, 이제 남편이 나와 하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죠. 이 이름처럼 레아가 아들을 셋이나 낳으니 그 마음이 조금 움직여진 것 같습니다. 자식들이 예쁘니 그 엄마도 예뻐보이는 것이죠. 그리고 넷째를 낳았습니다.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 그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야곱이 레아를 기뻐했다는 뜻이 됩니다.

 

형제_기쁨

 

 

솔로몬은 그가 쓴 시편에서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127:3~5)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수많은 후궁과 첩을 거느리고 일생을 왕좌에 앉아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 누릴 것을 다 자기 마음대로 누려본 솔로몬의 고백입니다. 그만큼 자식이 소중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토끼같은 자식들이 “아빠”하면서 달려와 그 품에 담쑥 안깁니다. 하루의 피곤함이 절로 사라지며,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이게 사는 맛이구나, 이게 행복이구나.. 그런게 자녀인 거죠.

 

이러자 라헬이 다급해졌습니다. 이전까지 언니와의 경쟁은 생각도 해보질 않았습니다. 게임 자체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그녀는 견디다 못해 야곱에게 바가지를 긁습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자식이 없으면 나는 죽은 여자라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 속담에 “자식이 없음은 생명이 없음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라헬이 그처럼 절박해진 것입니다.

 

라헬의 경쟁심은 본능적입니다. 본능이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감정이나 충동입니다. 이성이나 사고에 앞서가는 감정적 행위입니다. 무조건 이기고 싶은 승부근성이 동물의 본능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디슨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지나친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아들이 볼 때 아버지가 이룬 성공의 열쇠는 경쟁심이었다고 본 것이죠. 이처럼 경쟁심은 사람을 발전시키기는 훌륭한 재산이 되기도 합니다. 선의의 경쟁은 서로를 발전시키는 힘이 됩니다. 하지만 이 경쟁이 너무 심하게 되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생존력만 강하게 되어 집니다. 그런 경쟁에 사로잡히면 사람들은 참 행복을 알지 못하고 그저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진정한 친구를 사귀지 못하며, 인생의 참된 행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라헬은 이 경쟁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 언니와 끝없는 경쟁체제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생각해내고 마침내 하나의 묘수를 찾습니다. 그의 여종을 대리모가 되게 해 자신을 대신해 아들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유효했습니다. 그녀의 종 빌하가 야곱의 첩이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라헬은 자신의 아들인 것처럼 기뻐하며 그 이름을 ‘단’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하고 그 이름을 단이라 하였습니다(6절).

 

라헬은 도대체 무엇이 그리 억울했을까요? 아마 경쟁상대로도 여기지 않았던 언니가 자신이 하지 못한 일, 아이를 넷이나 낳으며 남편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마음이 상했다는 것입니다. 언니의 행복이 곧 나의 불행으로 여겨졌던 것이죠, 남편의 사랑을 독점하고도 그녀는 억울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경쟁이 갖는 가장 큰 폐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계속해서 경쟁만 하며 살아가면, 항상 억울합니다. 이겨도 억울하고 져도 억울한 게 경쟁입니다. 경쟁에서 승자는 있지만 영원한 승자는 없습니다. 우리가 경쟁만 중시하면 경쟁에서 승리한 승자의 영광만 관심을 갖고, 패자는 살아갈 자격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라헬은 빌하의 몸을 통해 두 번째 아들을 얻었습니다.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그 이름을 에셀이라 하였더라”(12,13절)

 

크게 이겼다는 뜻입니다. 레아는 넷을 낳았는데, 라헬은 둘, 그것도 자신의 몸이 아닌 종의 몸에서 난 두 번째 아들을 낳고 크게 이겼다며 호기를 부립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라도 해야 살 것 같다는 것입니다.

 

코스모스

 

 

루 게릭 병에 시달리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교회 음악가였던 그는 7년 동안 계속된 아내의 극진한 돌봄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의 1주기 추도식이 다가오자 남겨진 그 아내는 교회 공동체에 이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남편에게 루 게릭 병의 징후가 나타나던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우리에게 사랑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격려의 메시지, 편지, 카드를 지속적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전화도 주시고, 먼 데서 찾아와주시기까지 했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보내주셨습니다. 집을 비운 사이 망가진 것들을 고쳐주셨고, 길도 내주시고, 편지도 챙겨주시고, 쓰레기까지 치워주셨습니다. 우리의 적막한 시간을 달래주려고 멋진 사랑의 선물도 보내주셨습니다…성경 구절을 적어 보내주시기도 했고, 호흡기 치료를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이들을 위해 서도 기도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남편으로 하여금 자기가 여전히 찬양 사역의 한 부분을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진 여러분의 기도! 그 기도는 우리를 떠받쳐주었고, 특별히 절망의 자리에서 우리를 들어 올려 주었고,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불가능했을 힘을 북돋워주었고, 우리가 하나님의 원천에 잇대어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언젠가는 남편의 병이 이 땅에서 치유되지 않은 까닭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지금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나은 삶을 누리며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을 향한 감사의 마음은 사랑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습니다.”(Philip Yancy, Grace Notes, zondervan, 2009, p.176)

 

사람이 경쟁에만 몰입되면 이런 인간미를 느끼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보다 힘든 사람의 아픔 그 어려움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고, 그리고 서로 돕고 살아가는 삶의 행복을 행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죠.

 

상황이 이리 되니 레아도 가만 있을 수 없습니다. 동생이 하는대로 되갚아 줍니다. 자신의 여종을 야곱의 첩으로 주었고, 또 두 아들을 낳습니다. 갓과 아셀, 행복과 기쁨입니다. 여유가 있죠? 가진 자의 여유라고나 할까요? 그러자 라헬은 더욱 집착합니다. 그래서 아예 야곱이 레아에게 가지 못하도록 독점해버립니다. 두 자매의 관계는 적을 넘어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밀을 수확할 무렵입니다. 언니인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들에 나갔다가 합환채를 발견하고 자기 어머니에게로 갖고 왔습니다. 라헬이 그것을 알고 레아에게 말합니다. “언니 아들이 가져온 합환채를 나한테 넘겨 달라” 그 말을 들은 레아가 내 남편을 차지한 것만으로도 부족하냐? 이제는 내 아들이 구해온 합환채까지 차지하려느냐? 라헬이 레아에게 말하기를 “합환채를 내게 주면 오늘밤 남편과 자도록 할께” 라헬은 남편을 내주고 합환채를 샀습니다(14-15절). 합환채가 뭐길래 남편을 내주면서 가지려 할까? 합환채는 우리나라 식으로 이야기하면 산삼과 같은 것입니다. 합환채는 생긴 모양도 그렇지만 이걸 먹으면 쉽게 임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영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라헬은 임신하고 싶어서 합환채를 약재로 쓰기 위해 남편을 내주면서 합환채를 받은 것입니다. 합환채를 받고 남편을 언니에게 건넸습니다. 저물 때에 야곱이 들어서 들어오니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합니다. 내게로 들어 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다하고 그 밤에 야곱이 레아와 동침했습니다. 넷째 아들을 낳고 난 뒤 출산이 멈추었지만 그녀는 또 다시 아들을 갖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소원했고, 하나님은 레아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녀가 다시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았고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이름을 잇사갈이라 지었습니다. 또 다시 임신하여 여섯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셨다하며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이름을 스블론이라 하였습니다(19-20절). 레아는 라헬에게 합환채를 주었지만 도리어 두 아들과 한 딸을 낳았습니다.

 

라헬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입니다. 자신이 임신하려고 어렵게 합환채를 구했는데 임신은 도리어 언니가 하니 말입니다. 라헬은 거의 절망적이 됩니다. 그제서야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 하시기를 원하노라”(22-23절)

 

요셉의 이름이 “다른 아들을 더”라는 뜻입니다. 소원대로 또 다른 아들 베냐민을 낳았고, 출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렇게 해서 두 자매간의 자식경쟁은 종지부를 찍습니다.

 

경쟁은 인생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괴테는 “나도 인간이다. 내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경쟁하는 자라는 뜻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경쟁이 과도하게 되고, 그저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잃을 게 너무 많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그 놀라운 계획을 잃어버리게 되고, 친구를 잃게 되고, 삶의 행복과 평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상담가에게 어떤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제가 며칠 전에 남편하고 유람선을 탔지 뭐예요. 그런데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에게 물었죠. "여보, 혹시 당신하고 나하고 어머니하고 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배가 침몰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나와 어머니 중에 누굴 먼저 건져줄 거냐고요?" 그랬더니 남편이 저를 위 아래로 훑어보면서 "당연히 어머니부터 건져야지. 어머니는 한 번 돌아가시면 끝이지만 부인이야 또 얻으면 되잖아."라고 하는 거예요. 언제는 나 없으면 못 산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그러더니 결혼하고 나서 어쩌면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제가 이런 남편과 계속 살아도 될까요? 아니면 헤어지는 게 나을까요?" 현명한 상담가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차라리 부인이 수영을 배우세요."

 

코스모스2

 

우리는 정말 과도한 경쟁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든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친구도 경쟁자가 되는 정말 살벌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라헬은 언니 레아와 비교해서 경쟁대상이 되지 않을만큼 우월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대도 그녀는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그녀가 갖지 못한 것 하나, 바로 그 한 가지가 그녀의 인생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죠? 바로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레아는 도리어 부족했기에 하나님의 긍휼을 바랐고, 그 긍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돌보셔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의 경쟁을 통해 하나님은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남을 이겨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며,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됩시다. (*)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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