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창29:13]사랑하는 여자에게 다해주고 버림받은 남자의 고백

코이네 2016. 11. 1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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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을 향한 야곱의 사랑

본문 : 창세기 2913-20

2016.7.24.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1. 어떤 사람이 정말 만족감을 가지고 사는가?

 

미국의 중류 남녀를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조사의 결과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를 만족하게 사는 사람의 조건으로 종합할 수가 있었다.

(1)인생의 목적을 알고 그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 (2)자기 인생에 별 후회가 없는 사람 (3)몇 개의 장기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한 사람. (4)누군가를 무척 사랑하고 있는 사람. (5) 친구가 많은 사람. (6)발랄한 사람 (7)자신에 대한 비평에 대하여 너무 신경 쓰지 않는 사람 (8)큰 두려움 (Major fears)이 없는 사람.

 

 

 

2.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

 

야곱은 그렇게 바라던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았다. 그 축복에 야곱은 하나님이 복주신 향기가 나는 사람, 땅의 풍성함으로 가득 채워지고, 형제들의 머리가 되며, 세상의 저주를 끊고 복이 되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이제 이런 축복을 받았으니 그 다음날부터 야곱은 하늘에서 복이 쏟아질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늘의 축복이 아니라 형의 미움과 아버지의 진노였고, 그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워 집을 떠나 도망자가 되어야 했다. 잘된다는 축복을 받았는데 왜 도망자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야곱을 축복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축복을 받았으니 이제 복이 내리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복 있는 사람이 되도록 그 그릇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축복이 복이 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야곱을 그렇게 만들기로 이미 작정하셨고, 사람이 되도록 여러 훈련을 통해 다듬어 가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래도 그 지역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고,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 그들을 보살피는 하나님은 위대한 신이라고 숭배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자랑거리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지금 야곱은 어떤가? 자랑거리는커녕 그는 사람들의 지탄거리가 되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형과 아버지에게 죽일 놈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는가? 지금 이 모습대로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이제 하나님을 욕먹이는 사람에서 하나님이 자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은 야곱을 그렇게 변신하게 하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하셨고, 차근차근 하나씩 그를 훈련시키고 다듬어 가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를 성숙시키기 위해 애써 준비하시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두고 예정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예정을 이해한다면 우리 인생에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은 때로 순풍에 돛단 듯한 순탄한 길을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고난과 거친 연단을 통해서 하신다. 순탄한 길을 통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져 나갔고, 거칠고 힘든 광야 길을 통해서는 사람을 단련시키고 연단 시켜 다듬어 나갔다.

 

야곱도 그랬다. 그는 도망자가 되었다. 온갖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며 도망자의 길을 가는 중에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천국의 통로를 보여주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며, 야곱으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하였다. 이 일을 시작으로 야곱은 나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자신의 모든 생활에 하나님이 관여하시며, 도우시며,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된다.

 

라헬을 만나는 것도 그렇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하란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의 삼촌을 아는 사람들과 만났고, 또 자신의 외사촌 동생인 라헬을 만났으며, 이로 순조롭게 삼촌을 만나 그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우연도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까 싶고, 야곱은 스스로 난 참 재수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우연이었을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길로 야곱을 도우셨다. 자신을 확인시켜 주셨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야곱은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 이렇게 나를 도와주시는구나이런 신뢰가 쌓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신뢰는 점점 야곱의 믿음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도 극복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3. 사랑의 힘

 

하나님은 야곱에게 라헬을 보여주셨다. 하필이면 그 우물에서 야곱을 처음 만난 사람이 레아가 아니고 라헬이었을까? 라헬은 참 이뻤다. 야곱이 첫눈에 반할 정도의 매력을 갖고 있었다. 야곱은 라헬을 보자 또 하나의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저 여인을 내가 행복하게 해주어야겠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 삼촌 라반과 노예계약을 맺는다. 무려 7년이나 무상으로 일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반은 교활한 사람이다. 그는 7년이 아니라 14년을 염두에 두었으며, 레아도 이참에 한꺼번에 보낼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레아는 그 나이가 되도록 아무도 청혼해오지 않을만큼 뭔가 좀 모자라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두고 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원플러 원 행사를 생각한 것이다. 삼촌의 이런 계획은 꿈에도 모르고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 날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칠년을 며칠같이 생각될 정도라고 하였다. 그렇게 사랑에 빠져 그 어려운 타지 생활을 한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사랑에 눈멀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 세 가지의 신앙의 훈련을 하게 된다.

 

첫째는 헌신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한 일을 한다. 헌신한다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헌신한다는 것은 자신의 손해를 무릎쓰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손해도 기꺼이 감수하며 남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다. 사랑에 눈멀게 되면 이기적인 사람도 헌신하게 된다. 나의 것을 기꺼이 남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내어놓고, 남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으로 뿌듯해하여, 삶의 의미를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남을 행복

 

둘째는 인내와 기다림이다.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의 힘으로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된다. 고난보다 더 강력한 사랑의 힘으로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며, 미래의 소망을 갖고 기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사람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알게 된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내게 큰 행복인지를 알게해 준다.

사실 사람을 눈멀게 하는 사랑은 참 잔인하다. 사랑은 기브앤테익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일방적으로 다 주는 것이다. 사랑하며 살다가 정신이 번쩍 나서 내가 얻는 이익이 무엇이냐를 따지게 되면 눈먼 사랑만큼 허무한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사랑에 배신을 당하게 되면 이전까지 그 달콤했던 세상이 망할 세상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인생의 참 행복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다. 얻을 것 없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숨까지 주셨다. 그 비참한 십자가의 고통을 겪었다. 이것이 사랑의 실체이다. 주님은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우리 인생의 행복은 무엇인가를 얼마나 얻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예수님처럼 그저 다 주었을 때가 행복하다. 그것이 사랑이다.

 

지인 중에 죽자 살자 따라다니며 원하는 것 다 해주었지만 그만 버림받고 헤어진 한 남자가 있다. 그에게 억울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남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그녀를 그렇게 사랑했을 때 전 제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그것만으로 감사하죠.”

 

라헬에게 첫 눈에 반한 야곱, 칠년을 수일같이 여길 정도로 그는 한 여인에게 몰두했고, 그 사랑을 얻고자 했다. 아마 그 칠년이 그의 인생에 최고로 행복한 날이 아니었을까?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기도하자.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