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네설교

[계2:12] 양손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

코이네 2017. 2. 2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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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

본문 : 요한계시록 212- 17

2017.1.22.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사도 요한이 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교회가 둘러서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즉 온 우주의 중심에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의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고, 주님의 관심은 이 세상의 교회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를 통해 진정한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온 우주의 중심에 선 교회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 말씀의 해석

 

1) 버가모 교회

 

버가모는 당시 20만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있는 엄청난 도서관을 갖고 있으며, 명의 히포크라테스의 출생지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제우스와 각종 신들을 섬기는 신전들이 있었으며, 소아시아의 행정관청이 있는 곳입니다. 미국으로 비유한다면 뉴욕이 에베소로 본다면, 버가모는 워싱턴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곳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로마황제 신전을 최초로 세운 곳으로서, 황제 숭배에 있어 소아시아의 리더격인 도시로 신전지기라는 별명도 얻은 곳이어서, 다른 소아시아지역의 교회들은 일년에 한 차례 황제숭배의 위험을 안고 있었지만, 버가모는 일년내내 이 위협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버가모엔 사단의 위 즉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하며, 이곳에서 그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굳세게 믿음을 지켜 안디바와 같은 충성된 순교자가 있는 곳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아이러니 한 것이 그리스도인은 고난이 심할 때 도리어 믿음도 더욱 강력해집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처럼 죽음으로 고난을 이긴 충성된 교회였습니다.

 

2) 버가모 교회의 현실진단

 

그런데, 이런 충성된 교회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회개하지 않으면 속히 임하여 주님께서 그 입의 검으로 싸우시겠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속히라는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회개할 때 시간을 두고 미적거릴 사항이 아니라 지금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돌이킬 행위가 바로 발람의 교훈을 좇았다는 것인데, 니골라당과 발람의 교훈을 좇은 자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어서, 같은 의미로 해석하면 됩니다.

 

발람은 예전 이스라엘이 애굽 즉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들어가려면 가나안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거쳐가야 했습니다. 먼저 에돔이라는 지방을 지나서 모압이라는 나라를 지나가야 하는데, 이 모압을 지날 때 당시 모압왕이 발락이었습니다. 이 발락이 이스라엘을 상대하려니 걱정이 되어서 그 지역의 최고의 선지자를 모셔와 이들을 저주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데려 옵니다. 그런데 이 발람이라는 선지자는 왕이 원하는 저주는 하지 않고 도리어 축복을 하고 그곳을 떠납니다. 그렇게 하고 끝내면 좋았을텐데 탐욕에 물든 발람은 발락왕에게 이스라엘을 힘으로는 이길 수 없지만 그들 스스로 타락하게 해서 무너뜨리는 방법을 알려주고는 떠납니다. 모압왕은 그의 계책대로 당시 모압 신전에서 봉사하는 아리따운 여사제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접근시켜 유혹하게 하였고, 이것은 적중했습니다. 아리따운 여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자기 신전에 초청해서 함께 의식에 참여하게 하고, 제사를 지낸 맛있는 음식으로 잔치를 베푸니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그 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만 사천명에 해당하였습니다.

 

즉 버가모 교회는 눈에 보이는 우상에 대해서는 당당히 맞서 이기는 충실한 교회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의 우상에게는 속아서 안으로 곪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은 강한 듯 하지만 속으로는 곪아 썩어가는 교회, 바로 이것이 버가모 교회의 현실이었습니다.

 

3) 그리고 이런 버가모 교회에 주님은 자신을 양손에 날선 검을 가진 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버가모 교회가 회개하지 않을 경우 내 입의 검으로 싸우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주님께서 든 이 검은 성령의 검이며,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검이며, 세상을 심판하는 권위와 능력의 검입니다. 주님은 이 검을 들고 버가모 교회를 살리기 위해 주님은 급하게 처방을 내립니다. 바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즉시 회개하라는 엄중한 경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그리고 너희는 성령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면서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승리하는 자에게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승리한 자에게 감추었던 만나와 흰돌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만나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 것도 나지 않는 사막을 방황할 때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양식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섰을 때는 이 만나가 그쳤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이에게 주님은 이 만나로 먹이시며, 날마다 천국잔치를 경험하며 살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흰 돌은 당시 스포츠 경기를 하면 우승자에게 그 이름을 새긴 흰 돌을 주었습니다. 또한 큰 잔치가 있을 때 그 잔치에 들어가는 입장권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자에게 흰돌에 그 이름을 새겨 승리의 표창장을 주실 뿐 아니라 천국잔치에 들어가는 표징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2. 말씀의 적용

1) 우상이란

 

자 이제 버가모 교회에 좀 더 깊숙이 들어가봅시다. 버가모 교회의 장점은 눈에 보이는 우상에 대해서는 아주 강력하게 대처해서 승리했습니다. 당시 버가모지역은 황제숭배와 함께 각종 우상이 판을 치는 곳이었습니다. 이중 황제숭배가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독재를 원하는 황제가 백성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고자 자신을 신격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백성들에게 황제신상 앞에서 시저는 주님이십니다라고 외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버가모 성도들은 시저는 주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입니다그렇게 외치며 그들과 타협하지 않고, 도리어 죽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사실 버가모 교회에 그 교회 목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 신앙을 지켰지만, 새신자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그렇게 따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생활한다는게 어디 말처럼 쉽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이 때문에 교회를 떠났습니다. 사정이 좀 나아지면 그 때 예수 믿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틈을 탄 이단이 있었습니다. 바로 니골라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주 혹할만한 신학을 제안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짐을 다 벗겨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짐을 벗겨주셨다. 그 짐이 바로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 또한 우리의 구원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죄가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고 세상과 타협하고, 우상을 섬겨도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죄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했으니 그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죄에서 자유를 죄짓는 자유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죄짓는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는 자유, 죄를 극복하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차이를 모른 것이죠.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은 사람들을 혹하게 하였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의 주장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삶은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상이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은 형상으로 만든 것이 우상입니다. 사람들이 이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경배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우상입니다. 그런데 우상은 더 근본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보다 그 가치를 더 우위에 두는 것을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상이며, 우리가 이런 우상에 빠질 때 아무리 외적인 고난과 환란을 잘 이겨낸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속으로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상은 암적인 존재입니다. 평상시엔 잘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자라서 때가 되면 아주 치명적인 것이 됩니다. 암도 초기에 발견하면 치료하기 쉽지만, 말기에 이르면 회복 불능상태에 이르듯이 우상숭배 역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2) 왜 하나님보다 우선에 두어서는 안되는가?

 

사람들은 생각하기에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두어야 하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최고의 가치에, 최고의 자리에 하나님을 두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무엇이든 최우선에 두는 것에 속박당하며, 그것을 섬기는 성향이 있습니다. 즉 그것의 노예,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놓아야할 이유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최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과 비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최고에 두어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최고가 되면, 우리 삶은 비로소 제 자리를 찾게 되고,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최고의 자리에 서게 되면, 우리의 삶은 아주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자리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최고가 되면 어떨까요? 우리는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 능력은 결코 자기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두고 뭐라 말합니까? 에고이스트, 자기중심적인 사람, 이기주의자라고 합니다. 돈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었다고 하죠. 권력과 명예, 출세가 될 수 있습니다. 권력의 꼭두각시, 명예아 출세에 눈먼 인생이 됩니다.

 

때로 사람이 그 자리에 올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의 하수인이 됩니다. 예전 박정희 대통령 때 차지철이란 사람이 경호 실장이었는데, 그는 대통령을 등에 없고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 양반이 모 교회 집사였는데, 나에게는 두개의 태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며, 또 하나는 대통령이다, 하나님과 대통령을 같은 자리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두었으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대통령에게 바른 조언과 제대로된 보필을 할 수 있었을터인데, 대통령을 하나님 동창으로 두다보니 독재 대통령의 하수인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입니다.

 

니골라당이 왜 그런 주장을 했을까요? 또 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주장을 따랐을까요? 예수는 믿고 싶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욕심과 욕망 그런 것들을 포기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둘 다 어떻게 좀 해볼 수 없을까? 그렇게 해서 나온 게 니골라당입니다. 이걸 좀 긍정적으로 보면 아주 낮은 신앙단계라 할 수 있지만 계속 이 자리에 머물면 위험합니다.

 

이걸 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중심으로 컨디션 관리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최고 목적은 우리 인생의 최고가 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되고 난 후에 다른 것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해야 다른 일들이 제대로 된 진가를 발휘하며, 우리의 삶이 더욱 가치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무엇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진정 주님의 예배하는 자로서 주님을 인생 최고의 자리에 두고 주님을 섬기는 자입니까? 예전에 모 국회의원의 보좌관이 될 뻔하다 신학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 국회의원이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하는 말이 네가 그 때 그 사람 보좌관이 되었다면 지금쯤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할 것인데 안타깝다. 그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버지 그래봐야 대통령 종인데, 저는 째째하게 그런 종 안될랍니다. 저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종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최고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섬기는냐? 섬기는 분의 품위에 따라 그 종의 품격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생도 교회도 성공하는 비결의 기본은 그 최고의 자리에 주님이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종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