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
본문 : 엡 2;10
2017.12.10.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매주 에베소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우리는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우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태어나거나,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다른 동물이나 피조물과 다른 점은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영으로 소통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영으로 소통하는 신령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입니다. 이 신령한 복을 누릴 때 우리 사람은 온전해집니다.
신령한 복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셨다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백성, 자녀로 삼아주신 양자됨의 은혜입니다. 셋째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우리도 부활의 존재가 되어 영생을 누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네 번째,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재 하셔서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생활방식도 그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께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하나님의 기대를 알며, 그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더욱 풍성해지길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하도록 주님이 세우신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 성도들은 그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하나입니다. 성도의 삶은 교회가 그 기반이 될 때 더욱 성장하며, 온전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믿음이 더욱 온전해지면 교회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점점 성장하고 부흥하면, 그 성도의 삶도 점점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이렇게 함께 가는 운명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바로 “왜 사는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왜 삽니까? 이렇게 물으면 많은 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죽지 못해 삽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것보다 안타까운 말은 없는데,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부인하질 못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지금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있는데,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 현실이 왜 사냐고 물어볼 겨를도 없이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또 어떤 분들은 자기만의 인생 목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고자하는 목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린 어릴 때부터 이렇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갖고, 이 꿈을 이루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매진하는 삶에 참 익숙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목표를 이루고 나면 뿌듯하고 행복해야 하는데, 뿌듯하고 행복한 것은 잠시고 좀 있으면 허무해집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 중에 중도포기자가 참 많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 아이들의 인생의 목적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고, 이제 그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힘들게 공부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여기 오기 위해 그렇게 힘들게 노력했는데, 여기만 오면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는데, 도리어 이전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하니 공부에 질려버린 것입니다. 원하던 직장에 힘들게 들어간 직장인들이 얼마 안 있어 퇴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다음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전에 지쳐버린 것이죠. 그래도 죽지 못해 사는 것보다는 이렇게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살아가는게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목표의 끝은 어디일까? 생각해보면 참 피곤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꿈을 가집니다. 그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일만하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분들은 삶의 질이 좋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가 있습니다. ‘행복이 뭔가요?’ 행복이라는 게 참 뜬구름 같은 것이어서 딱히 정의하기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뉴질랜드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인구는 4백만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땅덩어리는 우리나라의 4배라고 합니다. 그 나라 사람들 상당히 여유 있고, 또 행복하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행복지수 세계 8위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행복이 뭡니까?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 공헌하며 사는 것’. 이 대답 어떤가요? 괜찮죠? 저도 우리 사회도 좀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다음 다섯 가지의 질문에 잘 대답하면 된답니다.
1. 나는 언제 가장 행복한가?
2. 그때가 가장 행복한 이유는 무엇인가?
3. 즐길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4.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인가?
5.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극복하고, 목표를 끝까지 이루어 낼 수 있을까?
그런데 행복하기 위해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 이것도 참 힘듭니다. 중국의 소설가 중에 임어당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양반이 "생활의 발견” 이란 책을 지었는데,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거창하게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 뭐 꼭 따로 있겠는가? 소풍 갈 때 사람들은 소풍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고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다 보면 도리어 그 때문에 더 힘드니, 인생을 소풍가듯 그렇게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죠.
왜 사는가? 그 질문에 답하다보니 죽지 못해 살다가 인생을 행복하게 즐기자로 왔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대답을 찾았습니까? 아마 여러분도 제 마음처럼 왜 사는지는 몰라도 인생을 행복하게 즐기며 살자.. 그렇지 않은가요? 그런데 이렇게 결론 내리기 전에 이것 하나는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행복하게 살았을까?”
흔히 복하면 오복을 말하지 않습니까? 장수하고, 건강하고, 선한 일도 하고, 풍요롭게 살다가, 편안히 잘 죽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것을 누리는 걸 축복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축복신앙을 보편적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런 보편적인 축복신앙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가장 복 없는 삶을 사신 전형적인 분일 겁니다. 여기에 비추어보면 예수님은 정말 지지리도 복 없는 분입니다. 복이 없어도 이렇게 복이 없는 분이 세상에 어디계십니까?
예수님은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겨우 33살, 꽃다운 나이에 죽었습니다. 재산도 모으지 못했고, 사랑스런 여인과 결혼도 못해 보았습니다. 당연히 자식도 없지요. 예수님이 호의호식 했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거기다 잘 죽지도 못했습니다. 저주받은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에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이란 고통은 다 맞보고 죽었습니다. 거기다 애지중지 하며 3년이나 먹고 재우며 키웠던 제자에게 은 30에 팔렸습니다. 가룟유다만 배신한게 아니라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욕하고 저주하며 모른다고 부인했고, 다른 제자들 역시 모두 배신하며 떠나갔습니다. 부모복도 별로, 재물복은 아예 없고, 그나마 인복이라도 있을까 했더니 믿었던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세상에서 멸시받고, 미움받고, 모함받고, 그리고 죄 없이 남의 죄 다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죽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누구도 예수님을 복이 없는 사람,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산 분으로 평가하며, 더 나아가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님에게는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 행복은 참 좋은 것이지만 행복하다고 사람을 고귀하게 만들어주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한 사람 더 이상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사람을 고귀하게 만들어주는 것 ..그런 게 있을까요?
우리 사람은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만들어진 존재이니 우리를 만든 분에게 왜 만드셨냐고 물어봐야 가장 올바른 답이 나올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지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든 후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들을 그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을 본 인간은 그것의 이름을 짓습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물건의 속성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만든 것에 대해 그 가치를 부여하고 찬송하고 기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람이 해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위해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후 축복하셨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예정하셔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양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는 자녀들입니다.
창세기를 보니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이게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일군,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상을 복되게 하는 복의 통로로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거룩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사람보다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불행한 인간 예수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우리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최고의 인생을 사신 분으로, 우리가 닮아야 할 모델로 삼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 우린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 사냐구요?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신령을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의 정체이며, 진면모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 이상 땅만 바로보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영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안락하게 살고, 행복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보다 거룩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적은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은 우리의 성품이 자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의 저자인 릭워렉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분의 아내가 케이인데, 아주 심한 병을 앓았습니다. 릭워렌 목사님과 목사님을 아는 수십 수백만명의 성도들이 게이 사모님의 병을 치료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고쳐지기는커녕 상태가 호전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그런데 사모님은 낙심하지 않고, 이 병의 고통 속에 자신을 있게 하신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더 간절히 기도하며,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아픈 자리를 벗어나 다른 병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성품을 강하게 하셨고,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주셨습니다. 그녀에게 간증을 주셨고 그녀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으로 우리 인생을 거룩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사람.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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